“중국도 세계의 룰(WTO)을 잘 지키면서 공정하게 거래하고 있습니다. 덤핑이나 터무니 없이 낮은 가격, 시장 교란 등의 얘기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한국에 대한 중국산 철강재의 수출물량을 조절해 달라는 한국철강협회의 완곡한 요청에 중국철강협회 관계자는 이같이 답했다. 중국 철강업계가 달라졌다. 한국의 요청에 대해 최대한 수용의사를 밝혔던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세계 최대 철강 생산국에 이어 최대 수출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이제 한국을 맞받아치는 입장에 서 있다. 중국의 설비확대에 힘입어 특수를 누렸던 한국 철강업계는 불과 수년만에 중국의 위협에 직면했다. 지난달 20일 중국 베이징을 찾았던 한국철강협회 관계자들은 중국 철강업계가 또 하나의 공룡으로 세계 철강시장에 자리잡았다고 입을 모은다. ◇공세 더욱 거세진다=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올초 업계 신년 하례식에서 “중국이 지난해 4,000만톤의 강재를 수출하면서 국제 철강시장의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자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중국산 제품에 대해 무역 규제를 검토 중”이라며 “이럴 경우 1,000만톤 이상의 중국산 제품이 대체시장을 찾아 우리나라 등 아시아로 밀려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과 EU로 향하던 중국의 수출물량이 무역규제에 막히면 우리나라로 밀려들어올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한국 철강업계는 이미 철근에서부터 선재, 열연강판, 후판 등 범용재와 일부 도금제품까지 중국산에 국내 시장을 내주고 있다. 저가를 내세운 파상공세에 빠른 속도로 시장을 잠식당한 것이다. 특히 가건물, 중소형 건축물에 사용되는 철근, 열연ㆍ냉연 소재 등 까다로운 품질이 요구되지 않는 제품의 경우 사실상 국내 기업들이 중국산에 대한 대응을 포기한 상황이라고 업계 관계자는 전했다. 국내 중ㆍ저급강 시장에 안착한 중국산 철강은 중ㆍ고급강 시장으로 확산돼 고급 열연이나 후판 시장에서 중국산이 일본산을 밀어내고 주요 수입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철강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 수입된 중국산 철강은 1,034만톤으로 사상 처음 1,000만톤을 넘어섰으며 지난 2005년 677만톤보다는 무려 53% 가량 늘어났다. 이는 국내 전체 수요(5,000만톤)의 20%를 차지하는 규모로 국내 중소형 철강사의 영업이익을 갉아먹기에 충분한 물량이었다. 더욱이 올들어서도 2월까지 국내에 수입된 중국산 철강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 늘어난 213만2,000톤에 달했다. 철강 전문가들은 앞으로 중국의 대(對)한국 철강 수출 공세는 더욱 거세질 것으로 내다봤다. 중국이 무역마찰을 우려해 수출증치세 환급(수출되는 제품에 대한 세금을 환급해주는 제도)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철강 수출을 억제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이마저도 수출량 감소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다. ◇인도 견제에 막힌 포스코=중국이 물량공세를 펼친다면 떠오르는 철강대국 인도는 ‘글로벌 M&A’의 핵으로 자리매김하며 위용을 떨치고 있다. 미탈스틸과 타타스틸 등 인도인 소유의 다국적 기업과 토종기업은 새우가 고래를 삼키듯이 대형 철강사인 아르셀로와 코러스를 인수하며 전세계 철강업계의 전면에 떠올랐다. 이 같은 빅딜의 이면에는 인도의 풍부한 광물자원과 경제성장이 자리하고 있다. 인도에 매장된 광물자원은 철광석 230억톤에 석탄 2,760억톤으로 추정된다. 대규모 광물자원을 단순 원자재로 수출하는 것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철강제품을 직접 생산해 판매하기 위해 선진기술이 축적된 기존의 철강기업을 인수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또 가파른 경제성장에 따라 도로, 항만, 철도 등 인프라는 물론 자동차, 가전제품 등에 대한 철강수요가 크게 늘어났다는 점도 인도가 철강기업 육성에 열을 올리는 이유로 꼽히고 있다. 이 상황에서 인도에 진출한 포스코는 최근 현지 철강업체와 주민들의 견제를 받고 있다. 2020년까지 120억달러를 투자해 연산 1,200만톤 규모의 일관제철소를 세우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지만 현재 부지매입 단계에서 철거민 이주문제에 막혀 전전긍긍하고 있다. 업계 일각에서는 인도에 첫 일관제철소를 추진하고 있는 미탈 등 인도 철강업체들이 은밀하게 포스코 프로젝트를 견제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철강업계의 한 관계자는 “포스코의 인도 프로젝트는 지난 2005년 발표 당시만 하더라도 현지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뀐 것 같다”면서 “현지의 견제에 맞서는 현명한 대응과 추진력에 따라 프로젝트의 성패가 갈릴 것”이라고 말했다. "몸집 키워야 살아남는다" 설비투자 경쟁 불꽃 "요즘 같은 인수ㆍ합병(M&A)시대에서 살아 남자면 과감한 설비투자를 통해 몸집을 불릴 수 밖에 없습니다. 고부가가치 제품의 생산비중을 늘리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죠."(포스코의 한 관계자) 최근 세계 철강업계의 최대 관심은 대대적인 설비 투자를 통한 생산능력 확충에 온통 맞춰져 있다. 중국의 바오산강철이 4일 오는 2012년까지 생산능력을 두배로 늘려 5,000만톤 체제를 갖추겠다고 발표한 것도 국내 철강업계를 바짝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 이 같은 설비투자는 중국 뿐만이 아니다. 인도, 브라질, 러시아, 동남아, 중동 등 신흥 개발도상국도 앞다퉈 설비투자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세계 철강업계의 설비투자액은 지난 95년 416억달러를 기록한 뒤 철강경기 하락과 공급과잉 등에 밀려 2001년 225억달러에 머물렀다. 하지만 2002년부터 중국의 철강수요 급증에 힘입어 2005년에는 532억달러까지 불어났다. 결국 가격이나 기술 등의 차별화 전략에서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철강업체는 변화의 회오리 속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비극에 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얘기다. 허진석 포스리 수석연구위원은 "철강 설비투자액의 증가는 철강가격의 상승과 증가로 글로벌 철강사의 수익성이 향상된 데다 저금리와 유가상승에 따른 오일머니 증가 등으로 국제 유동성이 풍부해져 철강업계 자금여력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최근 철강업계 설비투자의 가장 큰 특징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상공정 투자가 신흥 개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는 2010년까지 세계 상공정 설비증가의 70% 가량은 중국이 주도하는 가운데 그동안 철강설비에 무관심했던 인도, 브라질, 러시아, 동남아, 중동 등 자원보유국과 철강 수요가 늘어난 국가도 상공정 설비를 새로 증설할 예정이다. 후발주자들은 고급강 분야 투자에도 열성을 보이고 있다. 중국을 비롯해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와 동남아 국가 주도로 고급강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있다. 자동차용 강판 분야는 중국, 러시아 등 대다수 국가의 철강사들이, 전기강판 분야에서는 2010년까지 중국이 총 175만톤 규모의 생산능력을 각각 확대할 예정이다. 대만, 인도, 러시아 철강사들도 설비증설에 나섰다. 이에 따라 전세계적으로 공급 과잉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포스리에 따르면 세계 조강생산의 공급초과분은 오는 2010년 1억5,900만톤으로 지난해보다 2,100만톤 늘어날 전망이다. 또 2010년까지 열연, 냉연 등 탄소강 판재류와 스테인리스 생산능력 증가분의 60∼80% 이상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이뤄질 것이다. 철강협회 관계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은 막대한 설비투자에 힘입어 조만간 철강재를 순수출하는 지역으로 떠오를 전망"이라며 "한국 철강업체들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기술과 가격에서 우위를 점하고 차별화된 고급강을 생산하는 전략을 구사해야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