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생명을 살리자] <4> 소리없는 암살자, 희귀난치성 질환

한해 치료비만 수천만원… 환자 가족까지 사지로 내몰려<br>약 대부분 건보혜택 못받아 한달에 최대 수백만원 지출… 경제적 부담 감당못해 고통<br>간병비 등 3대 비급여 현실화… 희귀질환 인정범위 확대 절실

천안시 성정동에 사는 이선규(오른쪽)씨가 지난 2005년부터 희귀난치성질환을 앓고 있는 아들의 재활 운동을 돕고 있다. 전문가들은 질환의 인정 범위와 지원 수준을 동시에 늘려 생명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희귀질환 가족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윤석기자


지난 2005년 여름 이선규(44)씨는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모처럼 산으로 나들이를 갔다. 뜨거운 햇살을 내리쬐며 산을 오를 때만 해도 이후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사건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상에 올라 김밥을 먹고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며 땀을 식힌 뒤 하산을 하려는 찰나 큰 아들 염용 군이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이씨가 뒤를 돌아보자 염군은 발걸음을 마음대로 떼기 힘들다며 연신 헛발질을 해댔다. 남편과 함께 염군을 들쳐 업고 얼른 산을 내려와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불길한 생각이 잠시 뇌리를 스쳤지만 이씨는 별일 아닐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슬픈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자기공명영상(MRI) 검사 결과 병원은 부신백질이영양증(ADL)이라는 희귀난치성질환 판정을 내렸다. 2005년 당시 국내에 불과 12~13명만 앓고 있던 질환이었다.

ADL은 성염색체인 X염색체의 유전자 이상으로 뇌 신경세포가 파괴되는 희귀질환이다. 5∼10세 사이에 발병할 경우 6개월 만에 시력과 청력을 잃고 2년 안에 식물인간이 된 후 결국 사망에 이를 만큼 무서운 질환이다.

다행히 청소년기가 막 시작될 무렵 병이 나타났던 염군은 23세의 청년이 된 지금도 시력과 청력을 모두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혼자서는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고 걷지도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씨는 "사춘기가 찾아온 학창 시절에는 아이가 몰래 칼을 가지고 다니면서 툭하면 손목을 그어 몇 번이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고 회상했다. 이씨는 "그때는 가족 모두가 지옥을 헤매는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어차피 얼마 안 남은 것이면 값지게 살자는 마음으로 희망을 붙들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현재 염군은 동명의 영화로도 잘 알려진 '로렌조 오일'이라는 약품에 의지해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한 병 가격이 20만원이나 되며 염군은 한 달에만 5병을 복용한다. 재활·마사지 치료 등까지 합치면 매달 150만원의 돈이 빠져나가는데 전체 비용의 3분의2를 약값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약값이 턱없이 비싼 이유는 로렌조 오일이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정식 의약품으로 인정 받지 못하면서 건강보험 적용을 전혀 못 받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외의 여러 연구를 통해 이미 효과가 충분하다는 점이 입증돼 영국·스페인·이탈리아 등에서는 100% 지원이 이뤄지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아직까지 학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사실 이 같은 엄청난 비용 부담은 비단 이씨 가족만이 아닌 우리나라의 희귀난치성질환자 가족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짐이다. 실제로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이 지난해 희귀난치성질환자 523명의 진료비 명세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이 한번 입원해 치료를 받을 때마다 평균 400만원을 부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약값과 치료비를 포함하면 1년에 한 차례만 입원을 해도 2,000만원이 넘는 돈이 훌쩍 사라지는 셈이다. 희귀난치성질환이 '가정 파괴범'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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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희귀난치성질환자들은 정부의 '4대 중증질환 보장성 강화 계획' 발표를 누구보다 손 꼽아 기다렸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처럼 3대 비급여를 포함해 100% 보장이 이뤄지면 한순간에 비용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는 좀처럼 현실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6월 정부는 중증질환에 필수적인 의료서비스(고가항암제ㆍMRI 등)에 대한 건보 적용 계획만 내놓았을 뿐 선택진료비·상급병실료·간병비 등 3대 비급여의 개선은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슬그머니 연말로 미뤄버렸다.

더구나 현재 정부는 3대 비급여의 급여화보다는 단순한 제도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환자들의 불만은 점점 커지고 있다. 희귀난치성질환을 포함한 4대 중증질환의 경우 선택진료비와 상급병실료를 합친 비중이 전체 비급여 가운데 34~54% 수준에 이르고 있음에도 환자들의 비급여 부담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셈이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회정책팀장은 "3대 비급여를 제외한 중증질환 보장 계획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환자 부담 완화를 위한 실효성 있는 대책을 즉각 내놓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더 큰 문제는 정부가 희귀난치성질환으로 인정하는 질병 목록의 범위가 지나치게 좁다는 점이다. 현재 질병관리본부가 고시하고 있는 희귀난치질환은 389종이지만 이 가운데 급여 항목에 한해 낮은 본인부담률이 적용되는 질환(산정특례)은 138종에 불과하다.

염군이 앓고 있는 ADL은 다행히 산정특례에 해당돼 급여 항목의 경우 입원비와 진료비 모두 10%만 부담하면 되지만 나머지 250여개 질환은 공식적인 희귀난치성질환 목록에서 배제되면서 다른 일반 질환과 마찬가지로 입원비 20%, 진료비 30~60%를 부담해야 한다.

2개 이상의 경추(목뼈)가 선천적으로 융합된 질환인 '클리펠-파일 증후군'에 걸린 문모(26)씨는 "산정특례 적용을 받지 못해 지난해 3개월 간 입원 치료비로만 무려 2,008만원의 비용을 병원에 냈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희귀난치성질환자들이 경제적인 문제로 생명의 사각지대로 내몰리지 않도록 약값 지원과 함께 질환의 인정 범위를 대폭 늘리는 정부의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채종희 서울대 어린이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로렌조 오일처럼 이미 여러 연구에서 효과가 입증된 약제에 대한 지원은 물론 희귀난치성질환의 범위에 대해서도 국내 사례가 별로 없다는 등의 핑계를 대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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