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기억의 고집’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기억의 고집스러움을 실컷 확인하며 살아간다. 중학교 때 ‘floccinaucinihilipilification’이라는 긴 영어 단어가 신기해 몇 번 발음해 본 이후 이 29개 철자가 머릿속에 사진처럼 찍혀 있는가 하면 새 거래처 담당자의 이름은 매번 명함을 보고 확인하는 식의 기억 또는 망각의 방식을 누구나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기억은 두뇌 신경세포들의 작용이다. 외부로부터 뇌에 정보 자극이 들어오면 신경세포들끼리 신호를 전달한다. 신경세포가 자극을 전달 받는 순간 그 안의 특수 단백질이 변형되면서 다음 세포로 자극을 전달하는데 이 연결이 잘 이루어지면 기억이 잘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경세포에는 변형된 단백질을 본래 상태로 되돌리는 효소도 들어 있다. 이 효소에 의해 변형 단백질은 복원되고 그 결과 기억을 잊게 된다.
이 같은 기억과 망각의 시스템은 둘 다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대개 기억력이 떨어지는 상태를 문제시 하지만 모든 것을 기억하는 뇌가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생존에 더 불리한 조건이다.
창조적 마인드를 연구하는 미국 하버드대 앨렌 랭거 교수는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 체험하고자 하는 열정을 식힐 수 있으며 좋았던 일도 잊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그는 지식의 유무가 창의성 발휘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학생들에게 강의실 바닥을 강으로 가정하고 강 위에 나무블록을 이용해 다리를 만들도록 했다. 이 때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쪽에는 블록 사용법을 미리 알려주고 다른 한 쪽은 바로 작업에 들어가게 했다. 그 결과 미리 정보를 제공 받은 그룹에서는 다리 만드는 방법이 두 가지 나왔고 그렇지 않은 그룹에서는 열 가지가 나왔다.
이 실험은 예비지식을 갖고 있으면 그 범주 안에서 사고하기 쉽고 특히 창의적 발상이 필요한 경우에는 오히려 기억된 정보나 지식이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알려 준다. 따라서 기억이나 망각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뇌로 들어오는 정보에 대해 유연하게 반응하고 주체적으로 활용하는 마인드를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한 관건이다.
<제공:한국뇌과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