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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왜 앞선 문명을 자랑했던 고대 로마가 아닌 영국에서 시작됐을까. 산업혁명이 일어날 정도로 앞선 영국의 기술력 때문이었을까. 고대 로마에는 화폐 시스템이 없었던 것일까. 놀랍게도 영국 사람들의 기술력은 고대 로마의 그것보다 나을 게 없었다. 사실 산업혁명을 촉발시킨 증기기관은 아르키메데스 이후 잘 알려졌던 원칙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로마에는 일찌감치 시장 경제가 존재했고, 예금·대출·이자 같은 화폐 개념도 있었다. 독일의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내놓은, 자본주의가 영국에서 꽃 핀 배경은 바로 높은 임금. 엄청난 비밀을 기대했다면 허무할 수도 있겠다. 딱딱하다 못해 심오한 제목에 겁먹었다면 긴장을 풀어도 될 듯하다. 아니,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이런 식으로도 자본주의를 보는 시각도 있구나하는 차원에서 보는 편이 낳을 것 같다. 제목만 보면 자본의 명과 암을 파헤치는 분석서 같지만, 책의 상당 부분이 자본주의의 역사를 에피소드 별로 풀어내고 독특한 해석을 내놓는다. '자본주의의 작은 역사'라는 부제가 책의 내용에 더 어울려 보일 정도다.
18세기 영국의 임금은 세계에서 가장 높았는데, 이 때문에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는 것에 관심이 컸고, 결과적으로 역사상 최초의 '이득'을 만들어 냈다.
반면 로마는 소수 부자들이 더 나은 기술에 투자하기에는 그 필요를 느낄 틈이 없을 만큼 너무도 부유했던 반면 나머지 다수의 사람들은 가난했다. 대규모 농장에서 고용살이하며 최저 임금을 받는 악순환이 거듭됐다.
결국 로마인들은 정말 싼 노동력 탓에 자본주의자가 되지 못한 셈이다. 두 사례를 통해 저자는 독특한 결론을 내놓는다.
"자본주의는 실질 임금이 상승하는 한 안정적으로 발전한다. 영국의 경험은 아직도 유효하다." 어떤 챕터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자본주의의 보약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흔히 혼용하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개념의 차이점을 풀어내고, 자본주의가 국가와 결코 적대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증명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금융계의 위기와 소란, 자본의 위기는 마지막 장인 4부에 가서야 등장한다.
흔히 자본·경제를 논하는 서적이 폐해 위주의 사례를 나열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런 구성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는 자본주의에 관해 잘 알아야만 위기의 본질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책은 경제 하위 99%에 속하는 시민들이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에 관해 모르는 한 소수가 부를 지배하는 지금의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의적인 원제 '자본의 승리'가 국내에선 좀 더 적나라한 '자본의 승리인가 자본의 위기인가'로 번역된 이유다.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서문으로 시작해 흥미로운 자본의 역사를 짚어본 뒤 내놓는 전망은 의미심장하다. "자본주의는 종말을 고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성장이 필요하고 성장 없이는 붕괴한다. 물론 자본주의가 중간중간 발생하는 위기를 이겨낼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론 성장이 줄어드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이 책에선 자본주의의 종말이 결코 비극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종말이 역사의 종말이나 지구의 종말은 아닐 것이다.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고 계획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시스템은 나타날 것이다. 인간이 있는 곳에 종말은 항상 있다." 1만 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