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0월4일] 렘브란트


1669년 10월4일, 암스테르담의 빈민촌. 한 노인이 쓸쓸히 죽었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의 최후다. 당대 최고의 화가로 꼽혔던 그가 왜 이런 말년을 맞았을까. 빚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출생부터 인생 중반까지 풍요 속에서 지냈던 인물. 1606년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라이덴대학 입학 직후 학업을 접고 화가로 나서 처음부터 성공을 거뒀다. 최초의 집단 초상화 ‘툴프 박사의 해부학 교실’을 그렸을 즈음에는 귀족들이 그의 초상화를 얻기 위해 줄을 설 정도였다. 26세에는 명문가의 딸과 결혼해 명예는 물론 막대한 지참금도 챙겼다. 문제는 과용. 화구와 고서적, 소도구, 이탈리아 골동품을 구입하는 데 거액을 지출했다. 암스테르담 중심가에 5층짜리 저택도 은행 대출로 사들였다. 불행은 가정과 금전, 두 측면에서 찾아왔다. 아이 넷 중 셋이 생후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대표작 '야경'을 완성한 1642년 아내도 저세상으로 떠났다. 사별 이후 그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은행 빚을 못 갚아 1658년에는 저택도 경매에 부쳐졌다. 가난 속에서도 대작을 그려냈지만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들이 27세로 사망(1665년)한 뒤 4년 후 영욕의 생을 마감했다. 향년 63세. 굴곡진 삶만큼이나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미술품 거래회사를 설립하고 경매시장을 활성화시켜 귀족계층의 전유물이던 예술을 대중화한 선구자라는 분석과 철저한 반(反)시장주의자였다는 해석이 상존한다. 깊은 신앙심을 지닌 성서화가였다는 평가의 이면에 결혼을 요구하는 동거녀를 정신병원에 보낸 냉혈한이라는 분석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세상이 그를 ‘빚의 화가’ ‘비즈(사업) 화가’보다는 ‘빛의 화가’로 기억한다는 점. 렘브란트의 화폭에 새겨진 영롱한 빛의 가격도 갈수록 비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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