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기자의 눈] 정책금융 맏형답지 못한 산은


얼마 전 중국 현지에서 국제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떨린 목소리로 자신을 STX다롄의 한국 협력업체 A사 대표라고 소개한 그는 최근 회사가 겪고 있는 자금난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난 4월 공정이 중단된 후 STX다렌으로부터 밀린 매출채권 때문에 자금난이 심화됐다고 밝혔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그런데 그의 불만은 곧 산업은행으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금줄이 막혀 회사의 생사가 왔다갔다하는 판국인데 산은이 과거에 빌려줬던 대출금을 계속 갚으라고 독촉했다는 것이다. "산은이 정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책금융기관이 맞느냐"고 따져 물었다.

사연은 이랬다. 그가 운영하는 A사를 포함해 10여개 업체는 지난 2007년 STX가 중국 다롄에 진출할 때 산은의 금융지원을 받고 조선소 인근 부지에 공장을 지었다. STX다롄에 양질의 선박부품을 납품하기 위해서였다. 산은은 STX와 함께 대ㆍ중소기업 상생 모델을 만든다며 국내 중소업체들의 현지 진출을 적극 도왔다.


하지만 STX그룹은 망가졌고 STX다롄에도 피해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산은은 기존 대출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해당 업체들은 현 상황이 어려우니 대출만기 연장이나 상환유예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갚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시간을 좀 달라는 것이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W모씨는 "날 밝을 때 우산을 줘놓고서 비 오니까 우산을 뺏는 격"이라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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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은행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당시 대출조건이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이었고 거치기간이 끝난 만큼 예정대로 대출을 회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STX다롄이 사실상 가동을 멈춰 협력업체의 부도 가능성이 높아진 만큼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는 칭찬 받을 만하다.

그러나 산은이 한 가지 놓친 게 있다. 기업들이 외부충격으로 흔들릴 때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는 게 정책금융기관의 역할이다. 정책금융의 맏형을 자처했던 산은이 시중은행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습을 보인다면 차라리 정책금융기관이라는 호칭을 떼는 게 낫지 않을까.

다행히 보도가 나간 직후 산은 담당 고위임원이 전화를 걸어와 "기업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겠나. 알아보고 사태를 잘 수습하겠다"고 말했다. 뒤늦게라도 산은이 본연의 임무를 다시 한번 깨닫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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