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년간 기업의 설비투자 증가율이 연평균 1.2%에 머무르고 있다. 동 기간 중 경제성장률은 4.5%였다. 설비투자 증가율이 경제 규모의 증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설비투자의 부진이 결국 잠재성장률을 지속적으로 하락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비투자의 중요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대표적인 것이 경제 규모가 증가함에 따라 과거와 같이 요소(자본과 노동) 투입에 의한 경제성장 가능성은 낮아졌다는 논리이다. 중후장대한 설비투자에 의한 제품보다도 디자인이나 획기적인 기술 혁신에 의해 제품경쟁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야 할 때이고,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은 디자인 역량을 포함한 기술개발(R&D)투자이지, 설비투자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견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삼성전자와 같은 초일류기업의 경우 지난 몇 년 사이 과거에 비해 R&D투자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R&D투자의 70% 이상은 연구인력에 대한 인건비로 지출되기 때문에 설비투자로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R&D투자가 설비투자를 대체하는 현상은 극히 일부 초우량기업에 한정돼 나타나고 있다. 또 이들 R&D투자 중시 기업의 경우 설비투자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설비투자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동시에 R&D투자가 동반해서 늘어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들 기업조차 R&D투자가 설비투자를 대체하고 있다고 얘기하기 어렵다. 또 초우량기업을 제외하면 외환위기 이후 국내 기업들의 R&D투자 증가분은 극히 미미하다.
미국 재무성 장관 출신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나 미 재무성 부차관보를 지낸 브래드포드 드롱 버클리대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기술 혁신은 설비투자 내에 체화돼 있다. 말하자면 설비투자의 증가 없는 기술 혁신이란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이들은 일본이 선진국에 진입하게 된 지난 90년대 초반까지 고속성장의 동력은 전적으로 설비투자의 증가에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2003년과 2004년 비제조 중소기업의 설비투자는 마이너스 증가율을 기록했다. 이것을 보고 일부에서는 제조업이나 대기업의 설비투자는 문제가 없고 서비스 중소기업이 문제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또 서비스 중소기업이야말로 새로운 일자리 창출이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모든 정책적 역량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또한 사실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다. 실제로 제조업 21개 업종 중 18개 업종의 대기업(300인 이상 종업원 고용기업) 설비투자 규모는 아직도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하회하고 있다. 나머지 3개 업종도 상위 3개 우량대기업을 제외하면 대다수 대기업이 외환위기 이전에 비해 오히려 설비투자 규모가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 비제조 중소기업뿐 아니라 제조 대기업조차 설비투자가 부진한 게 현재의 실정이다.
설비투자가 부진한 이유가 무엇인지 필자가 속한 연구소에서 최근 국내 상장기업 501개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복수 응답을 들어본 결과 ‘수요 부족’(61%)이라는 전통적 요인 못지않게 ‘경영 요인’(59%)에서 원인을 찾는 기업이 많았던 게 특징적이었다. ‘경영 요인’이란 경영의 보수화, 자본조달 비용의 상승,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의 증가를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요인들은 주주자본주의의 강화, 부채 비율 200%, 공격자 우선의 M&A시장제도 등의 제도적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외환위기 이후의 산물이다.
설비투자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보수적 경영을 부추겼던 제도와 규제를 선별해 이를 개선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