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따라 강남 간다더니 정말 친구 덕에 금융인으로의 삶을 선택하게 됐지요." 자산 규모 155조원대의 하나금융그룹에서 기업금융 부문을 총괄하고 있는 임창섭 부회장은 증권업과 은행업을 아우르며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하고 있어 불도저라는 평가를 듣는다. 이런 그가 굵직한 경력을 쌓게 된 것은 한 친구의 우연한 권유 덕분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난 1980년 이전까지만 해도 그는 회사가 튼튼하고 직원에 대한 처우가 좋은 회사를 고르던 평범한 대학 졸업예정자 중 한명이었다. 그런 그에게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한 금융인 친구가 자신의 회사에서 함께 일해볼 것을 조언했다. 그 회사가 오늘날 하나은행의 모태가 된 한국투자금융이었다. 사실 임 부회장은 당시만 해도 금융에 대해 특별한 포부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는 우리 정부가 1972년 세계적 경제여건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8ㆍ3 긴급조치'를 단행한 후 금융의 자유화와 개방화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시기였지만 경제는 아직 중후장대한 제조업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대졸자들에게 금융은 1순위 선호 직종은 아니었다. 또한 한국투자금융은 주로 1년 만기 미만의 단기기업어음 등을 매매하는 업무를 주로 하는 단기자금회사였는데 단자회사는 당시만 해도 국내에 도입된 지 8년에 불과한 낯선 기업이었다. 이처럼 생경한 영역이었지만 임 부회장은 외국계 기업이 대주주였던 점을 감안해 실리적이고 진취적이었던 한국투자금융의 기업문화에 반해 입사를 지원했다. 한국투자금융은 일반 국내 기업들보다 월등히 많은 월급을 줄 정도로 유망 직장이었다. 하지만 업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그가 입사한 지 불과 2년 뒤인 1982년 정부가 제2금융을 활성화하겠다는 명목으로 단자회사를 대량 인가해주면서 직전까지 20여개였던 단자회사가 이후 32개로 급증했다. 결국 단자회사들은 과당경쟁의 늪에 빠지게 됐다. 더구나 단자회사들은 주 수익원이었던 기업어음시장마저 종합금융회사들에 빼앗기고 있었다. 만약 이때 그가 업황을 비관해 직장을 옮겼거나 한국투자금융이 무너졌다면 오늘날의 임 부회장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꿋꿋이 회사를 지켰다. 임 회장을 비롯한 한국투자금융의 초창기 멤버들이 지금도 하나금융그룹 내에서 단단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이런 어려움을 함께 이겨냈던 유대감 덕분이다. 그러던 중 쥐구멍에도 볕이 들었다. 1991년 2월에 '금융기관의 합병 및 전환에 관한 법률'이 임시국회에서 통과되면서 단자회사들은 은행이나 증권사 등으로 변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이 법은 강만수 대통령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이 재무부 이재국장이던 시절 심혈을 기울여 입법을 추진한 마지막 작품이었는데 한국투자금융은 이 법이 발효되면서 그해 은행(하나은행)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이로써 임 부회장에게도 제1금융권에서의 인생 2막이 열리게 됐다. "한국투자금융은 초기에만 해도 100여명의 작은 조직에 불과했어요. 그래서 은행으로 전환할 때 성공할 수 있을지 주변분들이 걱정을 많이 해주셨지요.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하나은행은 불친절하고 매너리즘에 빠진 은행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고객들에게 보여드려야 했지요. 당시로서는 국내 은행권에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혁신적인 영업을 시도했습니다." 실제로 하나은행은 기존 은행들과는 달랐다. 직원들이 가만히 창구에 앉아 고객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려도 장사가 됐기 때문에 고압적이었던 기존 은행들과 달리 하나은행 임직원은 직접 발로 뛰어 고객들을 찾아다녔다. 임 부회장 역시 발품영업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뛰었다. 그런 그는 이후 가계금융부장직을 맡았다. 그때가 하필 외환위기가 터졌던 1997년 하반기 무렵이었다. 임 부회장은 은행들이 한결같이 대출자산 부실로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을 때 가장 최전선에서 가계대출영업을 해야 했으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그의 지인들은 귀띔해줬다. 그는 "당시에는 오직 리스크관리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다"며 "이후에도 2003년의 SK글로벌 사태, 2008년의 리먼브라더스 파산 사태 등의 큰 고비들이 닥쳤지만 외환위기 때의 리스크관리 훈련 덕분에 한결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임 부회장이 경인 지역의 기업금융본부장을 맡게 됐다. 인천 지역에는 중소 수출기업들이 많았는데 본부장이 되고 나서도 그는 직접 고객기업들을 발로 뛰며 찾아다녔다. 은행원의 고압적인 태도 앞에 사정하며 은행에서 돈을 빌려 쓰던 중소기업 경영인들에게 임 부회장의 찾아가는 영업 방식은 감동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발품팔이'는 부회장이 된 지금도 여전하다. 그는 그룹 내에서 하나은행의 기업영업 부문과 하나대투증권의 투자은행(IB) 부문, 부동산사업그룹(하나다올신탁ㆍ다올자산운용)은 물론이고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해외 현지법인까지 총괄한다. 서로 직장문화와 성과 보상 방식, 업무ㆍ영업 스타일 등이 천차만별인 은행ㆍ증권을 엮어내기도 쉽지 않은데 부동산에 해외사업 부문까지 챙기려니 부지런하게 현장을 찾아 임직원과 터놓고 소통하지 않으면 조직을 융화시키기가 어렵다. 그가 부회장으로 기업금융그룹을 총괄하게 된 것은 지난해 3월부터인데 불과 1년2개월여 만에 그는 2,000여명에 달하는 휘하 임직원과 일일이 다 대면했을 정도로 부지런을 떨었다. 또한 다음주부터는 해외 직원들과의 스킨십이 시작된다. 이를 위해 그는 중국을 시작으로 인도네시아 등을 수시로 누빌 예정이다. 그는 직원들, 특히 새내기 직원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지 말고 보람과 가치를 찾으라"고 조언한다고 한다. 임 부회장은 "그저 은행원은 안전한 담보를 잡아 편한 대출장사만 한다고 생각하면 이 직종에서 오래 못 버틴다"며 "특히 기업금융을 한다면 직접 경영인들을 찾아가 경영상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종합적인 솔루션 프로바이더(해결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거기에서 보람을 찾으라고 직원들에게 조언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에는 기업고객들에 원스톱의 경영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이 서구 유수의 글로벌 IB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우리의 수준이 상당 부분 선진 IB들을 따라잡았다"며 "세계인들이 대한민국이라고 하면 최고의 IB를 떠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임창섭 부회장은 ▦1954년 경남 마산 ▦1980년 서강대 경영학과 졸업 ▦1980년 한국투자금융 입사 ▦2001년 하나은행 경인기업금융본부장 ▦2003년 하나은행 심사본부장 ▦2005년 하나은행 부행장(기업고객사업본부 대표), HFG IB증권 대표 ▦2009년 하나금융그룹 부회장(기업금융부문 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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