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CEO&Story] 김경원 디큐브시티 대표

세계경제 대신 소비자 마음 연구… 프로라면 뭐든 해내야죠

김경원 디큐브시티 대표가 서울 구로구 신도림 디큐브백화점 3층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다. /이호재기자


삼성경제硏·CJ그룹 전략총괄 거쳐 대형 쇼핑몰 수장으로 '변신 또 변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성장 밑거름

매장 고급화 이어 유명 맛집 '삼고초려' 매일 고객상담실 들러 개선사항 귀담아
불황속 성장…강서지역 최고 백화점 성큼



"한국에서는 모두가 빚이 많기 때문에 소비를 하려 하지 않는다."(2008년 12월17일자 WSJ 인터뷰)

"내년부터 세계 경제의 깊고 긴 불황이 시작될 것이다."(2012년 8월호 포춘코리아 인터뷰)

그의 진단과 예상은 정확했다. 학비를 내느라, 집을 사느라 대출을 받았는데 소득은 늘지 않았다.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기가 과거보다 어려워졌다. 저금리 때문에 부동산·주식으로도 돈 벌기 힘들어졌다. 그런데 나라 밖에서는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에 이어 유로존 재정위기까지 터지면서 세계 경제에 엄청난 불황이 덮쳤다. 한국 경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에 불안을 느낀 사람들은 지갑을 움켜쥐었다. '소비' 자체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최장수 글로벌경제·금융실장과 CJ그룹의 전략기획총괄 부사장으로서 환율과 유가를 전망하고 세계 경제흐름을 분석했던 김경원 디큐브시티 대표의 과거 전망은 모두 현실로 나타났다.

하지만 '금융실명제 보완책'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변모' '대한민국 경제 2013 그 이후' 등 수많은 보고서와 저서를 통해 한국 경제에 얼리워닝(조기경보)과 해법 제시를 동시에 해왔던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대형 복합쇼핑몰의 대표가 돼 불황과 맞서 소비를 일으켜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될 자신의 미래였다.

"CJ그룹에서 나온 후 김영대 대성 회장께서 가장 먼저 저에게 영입을 제의했습니다. 당연히 그룹 전략업무를 맡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디큐브시티 경영을 얘기하시더군요. 그냥 '그러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의였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화답했다. 그리고 서울 구로에 위치한 디큐브시티로 왔다.

"그동안 커리어를 쌓아오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변신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프로라고 생각합니다. 프로는 조직에서 원하는 성과를 어떻게든 내줘야 합니다. 프로는 자기를 정형화된 틀 안에 넣어놓고 이런 건 할 수 있고 저런 건 못한다고 하면 안 됩니다."

삼성경제연구소 재직 시절부터 김 대표는 조직에서 원하는 건 무엇이든 '오케이'했고 몇 날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지난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자 다들 '선거혁명'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이건희 회장이 연구소에 갑자기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이번 선거 결과가 혁명인지 답을 달라고 하셨어요."

역사와 관련된 과제가 경제연구소에 주어진 것이다. '회장님의 오더'는 김 대표에게 떨어졌다. 그 역시 투자론을 전공한 박사였지만 '못합니다'라는 답변은 할 수 없었다. 조직 내 누군가는 반드시 맡아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부터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의 작품까지 모든 자료를 독파했고 일주일 만에 관련 보고서를 완성했다.

"회사가 제게 맡기는 일은 당장 저와 관계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을 저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제게 주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때 제 별명은 '쓰레기 하치장'이었어요. 돌고 돌아 아무도 맡지 않으려는 일들이 항상 제게 주어졌거든요."

김 대표는 '쓰레기 하치장'이라는 별명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 종류의 일들을 맡은 후 보란 듯이 완수하는 과정을 통해 그 역시 성장했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CJ그룹으로 이직했을 때도 이재현 회장이 그간 제가 해왔던 일과 전혀 다른 '전략총괄'을 맡겼습니다. 그래도 겁이 나진 않았습니다. 무모한 자신감일 수도 있지만 삼성그룹의 사업전략 등에 대한 연구용역을 수행한 적도 있었기에 무조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 자신을 믿었습니다."

2009년 CJ그룹으로 옮긴 후 김 대표는 그룹 전략총괄 부사장은 물론 CJ경영연구소 소장직까지 수행했다. "디큐브시티를 맡기로 한 것 역시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CJ그룹에서 전략을 담당하면서 깨달은 건 '경영의 본질은 똑같다'였습니다. 게임회사든 철강회사든 최고경영자(CEO)의 역할은 회사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이냐 판단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실무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직원들과 '소통'을 하면 경영에 필요한 모든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12년 9월 김 대표가 디큐브시티로 왔을 당시의 상황은 결코 녹녹지 않았다. 그의 눈에 구로 한복판에 휘황찬란하게 들어선 디큐브시티는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제대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2011년 8월 문을 연 디큐브시티는 투자비가 1조4,000억원에 달하는 대형 복합몰이다. 대성산업이 과거 연탄공장으로 사용했던 부지(연면적 35만247㎡)에 일본 롯폰기힐스를 개발한 미국 저디와 일본 모리가 국내외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빼어난 건물을 설계했다. 오픈 직후 휩쓴 수많은 글로벌 건축상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백화점은 물론 호텔·아트센터·키즈파크·영화관까지 모두 들어서 있다. 과거 연탄공장을 운영하며 돈은 많이 벌었지만 당시 매연으로 구로의 하늘을 까맣게 만들었고 연탄공장 탓에 주거환경이 열악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구로 주민들에게 '마음의 빚'을 갚고 싶었던 김 회장의 진심이 담긴 건물이다.

"구로 주민들에게 '프라이드'를 선물하고 싶었던 김 회장께선 정말 최고의 건물을 지었습니다. 외부는 물론 내부 디자인까지 수준이 굉장히 높아요. 그런데 문제는 건물의 수준과 판매상품 수준의 간극이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디큐브시티 오픈 초기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다. 신도림역을 오가는 사람들이 잠깐씩 들러 쇼핑을 하는 '철새상권'으로 판단해 중저가 상품 위주로 배치했던 것이다.

"구로구 전체 면적의 54%가 아파트예요. 디큐브시티 주변만 해도 아파트가 꽉 들어차 있고 조만간 6,500세대가 또 들어옵니다. 이곳은 텃새상권입니다. 소득수준이 낮지 않아요. 서울의 평균이에요. 소비자들이 밥만 먹고 그냥 나가더라고요. 소비자들은 그저 싼 물건을 원하지 않아요."


김 대표는 취임 후 백화점 MD 구성의 고급화와 다양화에 착수했다. 비어 있는 것과 다름없던 1층에 유명 화장품 브랜드들을 유치하고 강남 가로수길과 인터넷몰 등에서 유명한 북유럽 유아동 브랜드도 들여왔다. 또한 대형 건물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원스 인 네버 아웃(Once in, Never out)' 전략을 가동했다. 롯데시네마와 신세계 스타수퍼, 자주 등을 새로 입점시켰고 유명 맛집도 삼고초려하면서 유치했다. 연말에는 대형 서점도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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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표가 디큐브시티의 영업전략을 바꾼 후 디큐브시티는 유통업계의 전반적인 불황 속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올 상반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5%가량 신장했다. 세월호 참사의 여파가 있었던 6월에만 신장률이 15% 정도였고 나머지 달에는 30%를 기록했다. 일평균 방문객 수도 꾸준히 늘고 있어 조만간 하루에 디큐브시티를 찾는 사람이 6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당연히 영업이익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이 같은 추세라면 연내 월별 기준 흑자전환이 가능할 것이라는 게 김 대표의 예상이다. 강서 지역 최고의 백화점으로 만들겠다는 목표가 한층 가까워진 것이다.

"디큐브시티의 성장 뒤에는 '소통'과 '겸손'이 있습니다. 변하기 전에도 현장 직원들과 고객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직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다 보면 '답'이 나옵니다. 고객의 마음을 읽기 위해 고객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문제점이 보이고 해결책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김 대표는 매일 고객상담실을 방문하고 홈페이지에 올라온 고객 의견을 읽는다. 최근에는 고객의 의견을 받아들여 측면 입구 앞에 있던 커다란 동상을 철거해버렸다. 대신 인조잔디를 깔아 아이들이 축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유모차 고객들의 편의 증진을 위해 유모차 클래식과 유모차 영화관도 운영하고 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경험했으니 아는 게 더 많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CEO의 착각입니다. 특히 유통업에서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고객을 가장 잘 압니다. 고객의 소리를 직접 듣는 현장 직원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제가 먼저 열린 자세로 다가서니 이제는 직원들끼리도 많이 소통합니다. 소통 끝에는 결국 가장 좋은 아이디어를 도출해냅니다. 저는 그냥 듣기만 합니다."

그는 직원들에게 '겸손'도 계속 강조한다. '모든 게 고객 덕분'임을 잊지 말라고 끊임없이 조언한다.

"겸손은 회사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중요합니다. 저는 그간 맡았던 모든 커리어에 감사합니다. 영문학도였기에 인문학적 소양을 갖출 수 있었고 경영학을 배워 경제금융전문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삼성에서 수많은 보고서를 읽고 작성했던 것, 선배들에게서 배운 지혜와 리더십, CJ에서 맡았던 전략 수립과 현업 적용 등이 모두 지금 CEO 역할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매사 모든 순간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경원 대표는

△1959년 전북 김제

△1977년 경성고 졸업

△1984년 서울대 영문학과

△1986년 미 위스콘신대 MBA

△1991년 미 컬럼비아대 경영학 박사

△1991~1995년 삼성경제연구소 금융연구실장

△1995~1997년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

△1997~2009년 삼성경제연구소 IMF TF팀장

△2000~2006년 삼성경제연구소 상무, 전무

△2009~2011년 CJ그룹 전략기획총괄 부사장

△2012년 9월~ 디큐브시티 대표이사 겸 대성산업 수석이코노미스트



■김대표의 '프로정신'론

책임의식 갖고 자존심 지켜라
동료 고객에 겸손하라

김경원 디큐브시티 대표는 직원들과 거리낌 없이 대화한다. 집무실 근처 지원부서 직원들은 물론 백화점의 플로어 매니저들도 수시로 찾아가 이야기를 건넨다. 김 대표가 디큐브시티로 온 초반에는 툭툭 던지는 김 대표의 농담에 당황하는 직원들도 많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직원들이 먼저 김 대표에게 웃음을 유발하는 '일격'을 날릴 정도로 사내 분위기가 수평적이다. 직원들이 웃으면서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어주기 위해 계급장을 내려놓고 편하게 대하기는 하지만 그런 가운데 김 대표는 인생 선배이자 회사의 수장으로서 직원들에게 중요한 인생의 철칙을 알려주는 데도 주저하지 않는다.

김 대표가 특히 신입사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프로정신'이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젊은이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성공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김 대표가 말하는 프로정신은 세 가지. 첫째, '프로의 자존심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는 "프로는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갖고 일해야 한다"며 "어떤 일이든 한다고 했으면 반드시 해내야 하고 그러면 결국 주변의 신뢰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둘째, '프로는 선의로 일을 해야 한다'고 김 대표는 강조한다. 현재 몸담고 있는 회사를 내일 당장 떠난다 하더라도 오늘 이 순간은 회사가 잘되도록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셋째, '프로는 먹었던 우물에 침을 뱉지 않는다'다. 김 대표는 "아직도 삼성 제품만 사서 쓰고 CJ 제품만 먹는다"며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결국 한때 내가 최선을 다해 일했던 회사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 대표가 강조하는 프로정신은 '겸손'이다. 쉽지 않지만 남에게는 관대하고 자기에게는 엄격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 그는 "논어에도 궁자후이박책어인 즉원원의(躬自厚而薄責於人 則遠怨矣)라는 구절이 있듯이 자신을 다스릴 때는 엄하게 하고 남을 탓하는 건 가볍게 한다면 원망의 목소리가 멀어질 것"이라며 "주변 동료와 고객을 모두 겸손함으로 대하라"고 조언한다. 김 대표가 매주 집게와 포대를 들고 디큐브시티 앞 공원에 나가 직접 쓰레기를 줍는 것 역시 겸손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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