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수주 위축 걱정하기보다 활황기 대비 전문인력 육성 필요
쿠웨이트·이란 올 유망 시장… 신기술 확보로 공사 단가 낮춰야
도급형태 벗어나 금융·기획력 갖춘 투자개발형 사업도 키우길
"유가 하락이 장기화할 경우 해외수주가 줄어들 수 있지만 오히려 이를 해외건설 업계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최근 건설업계의 최대 화두는 유가 하락에 따른 해외수주 위축 여부다. 유가 하락으로 재정상태가 나빠진 산유국들이 정유·석유화학 플랜트 발주를 늦추거나 취소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어서다. 특히 우리나라의 해외건설 수주와 유가와의 상관관계는 0.9 수준으로 높은 편이다. 유가와 해외수주량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최재덕(67·사진) 해외건설협회 회장은 유가 하락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변수인 만큼 현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국제유가 하락세가 지속되면서 국내 건설업체들의 해외수주가 감소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과거 사례를 볼 때 해외수주가 위축되는 정도는 유가 하락 기간에 따라 유동적일 것"으로 예상했다. 최 회장을 만나 해외건설 시장에 대한 진단과 이에 따른 대응방안을 들어봤다.
최 회장은 일단 "유가 하락과 해외수주와의 관계를 예측하려면 과거 사례부터 살펴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우선 지난 1979년부터 1985년까지 배럴당 30달러대를 유지하던 유가는 1986년부터 1999년까지 14년간 15달러 안팎으로 하락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해외수주액도 1980년대 초반 연간 100억달러 수준에서 50억달러대로 급감했다.
반면 2008년 말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로 배럴당 90달러를 웃돌던 유가가 2009년 한때 30달러대까지 떨어졌지만 하락세가 단기간에 끝나면서 수주에 별 영향이 없었다. 2009년 해외수주는 총 491억달러로 2008년보다 15억달러 늘었다.
이처럼 유가 하락이 장기간 지속되면 해외수주에 지장을 주지만 단기간 하락한 후 반등하는 경우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유가 하락세가 단기적으로 끝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중동 산유국들의 균형재정 유지가 가능한 배럴당 60~70달러 수준을 유지할 경우 해외건설 수주에도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만약 유가 하락이 지속될 경우에도 최근 10년간 이어진 고유가로 재정여건이 비교적 양호한 걸프협력이사회(GCC) 국가들은 한동안 계획된 발주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카타르·아랍에미리트(UAE) 등 GCC 국가들은 우리나라 해외수주의 25%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자스민 혁명' 이후 정유 플랜트 외에 주택·병원 등 사회기반시설 발주를 늘리는 추세다.
다만 GCC 국가들과 달리 재정여건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산유국들은 발주를 줄일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최 회장은 "재정의 석유 의존도가 높은 러시아와 베네수엘라, 아프리카 등 국가들은 인프라 투자 축소나 지연이 예상된다"며 "아직 실제로 발주를 연기한 사례는 없지만 이들 국가가 사업축소 및 연기를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유가 전망과 관련해서는 아직 불투명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상승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는 게 최 회장의 판단이다.
그는 "중동 이외 국가들이 감산에 나설 가능성이 있고 중국과 인도 등의 수요 증가를 감안하면 유가가 중장기적으로 현재의 낮은 수준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했다.
아울러 최 회장은 유가 하락에 따른 수주위축 가능성을 지나치게 걱정하는 분위기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지금의 저유가 상황을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기회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국내 건설업계의 해외공사 수주는 단기간에 양적으로 급성장했지만 질적 성장은 미흡하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나라의 해외수주는 2000~2005년 연평균 54억달러에서 2005~2009년 연간 328억달러, 2010~2014년에는 연간 653억달러로 급성장했다. 최 회장은 "해외수주가 10년 만에 10배 넘게 급증하면서 전문인력 부족과 관리능력 저하 등 부작용이 발생한 것도 사실"이라며 "이 같은 현장관리의 문제는 저가수주와 함께 최근 해외공사에서 대규모 적자가 발생한 이유 중 하나"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현재의 저유가 국면은 국내 업체들이 인력과 장비·네트워크 등 해외건설 시스템 및 펀더멘털을 정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점이기도 하다"며 "저유가 상황이 지속될 경우 이를 다음 활황기에 대비할 수 있도록 내실을 다지는 기회로 적극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유가 하락으로 해외건설 성장세가 주춤해질 수 있는 현 상황을 경쟁력 강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조언이다.
최 회장은 올해 해외수주 목표와 관련해 지난해와 같은 수준의 실적은 기대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지난해 해외건설 수주액은 총 660억달러로 전년보다 1.2% 증가했지만 당초 목표로 했던 700억달러 달성에는 실패했다. 최 회장은 "최근 몇 년 동안 해외수주는 한두 건의 초대형 수주를 제외하면 연간 550억달러 수준을 꾸준히 유지해왔다"며 "올해도 유가와 관계없이 600억달러 안팎의 수주는 달성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유가 전망이 불투명해 올해 해외수주 목표를 세우기가 쉽지 않지만 1·4분기 동안 유가의 방향성을 지켜본 뒤 협회 차원에서 해외수주 목표 범위를 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 회장은 올해 해외 유망시장으로 쿠웨이트와 이란을 꼽았다. 그는 "올해 제일 큰 시장은 쿠웨이트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당장 다음달 총 100억달러 규모의 클린퓨얼 프로젝트 중 60억~70억달러 규모의 3개 패키지 입찰이 실시될 예정"이라며 "모든 패키지에 국내 업체들이 참여하고 있어 수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이란도 미국 등 서방의 경제제재가 풀릴 경우 중장기적으로 국내 업체에 큰 기회가 될 것"이라며 "특히 이란은 전쟁 중에도 공사현장을 지킨 한국 업체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고 소개했다. 그는 해외건설이 지속 성장하려면 기술력 확보가 중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우리와 해외시장에서 경쟁하는 중국의 경우 해외건설을 세력확대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일본은 원천기술과 금융 분야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맞서는 우리나라의 강점은 우수한 시공능력과 공기준수, 그리고 풍부한 신도시 건설 노하우다. 하지만 국내 건설업계는 국왕이 직접 나서 우리 업체들에 러브콜을 보낸 사우디아라비아의 대규모 주택건설 프로젝트 수주전에서 실패를 맛봐야 했다. 당시 사우디 국왕은 한국 업체들의 신도시 건설경험을 높이 사 현지건설 실적이 없는 한국 업체들에 특별히 건설면허까지 발급해주며 주택건설을 맡길 것을 지시했지만 결국 프로젝트는 한국 업체보다 절반가량 낮은 가격을 제시한 터키와 사우디 현지업체에 돌아갔다.
최 회장은 "해외건설의 기본은 기술력이고 공사 단가를 낮추려면 신기술과 신공법이 핵심"이라면서 "기술개발을 통해 건설단가를 낮추면 세계시장은 무궁무진하며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연구개발(R&D) 투자 지원이 절실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신기술로 건설단가를 끌어내리면 미개방된 해외 주택건설 시장을 새로 개척하고 동시에 국내 주거복지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만 정부의 건설 분야 R&D 투자는 아직 미흡한 수준"이라고 아쉬워했다.
이와 함께 최 회장은 정부가 고위급 외교 등을 통해 국내 건설업계의 수주에 힘을 실어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최근 해외건설 시장에서는 시공이나 엔지니어링 분야의 경쟁력은 물론 금융·기술·외교력 등이 총망라된 종합 경쟁력 확보가 관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 회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정상외교 이후 급진전된 카자흐스탄 바라시 화력발전소 사업의 일화를 소개했다. 이명박 정부 때 국내 업체가 수주한 이 프로젝트는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을 판매하는 계약 체결이 지연돼 사업이 지지부진했지만 박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 이후 전력공급 계약이 체결되며 사업에 속도가 붙었다. 최 회장은 "박 대통령 순방 이후 카자흐스탄에 다시 가서 카자흐스탄 정부의 담당 국장을 만났더니 자기는 전력공급 가격이 높게 설정돼 계약에 반대했지만 대통령 프로젝트라 결국 계약이 체결됐다고 하더라"며 "이런 것이 바로 정상외교의 효과"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최 회장은 국내 건설업계가 단순도급 형태의 수주에서 벗어나 투자개발형 사업 비중을 높이는 일이 시급하다며 기업 최고위층의 과감한 투자와 지원을 주문했다. 현재 국내 건설사들이 수주한 해외건설 프로젝트 가운데 투자개발형 사업의 비중은 3% 정도에 불과하다. 최 회장은 "과열경쟁에 따른 수익성 악화에서 벗어나려면 투자개발형 사업으로 가야 하는데 국내 업체는 금융과 프로젝트 발굴 등 기획능력이 아직 취약하다"며 "기획·금융 부문을 키워 투자개발형 사업을 활성화하려면 기업 오너의 강력한 리더십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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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합 제재' 순차 진행 아닌 일괄처리… 해외수주 걸림돌 없애야 이재용 기자 |
/대담=정두환 건설부동산부장 dhchung@sed.co.kr
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