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7년 10월2일,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 이슬람군 2만여명이 공격을 시작한 지 12일 만이다. 승패는 이미 결정 난 상태였다. 예루살렘 왕국의 병력이라야 수천명. 전력의 핵심인 기사는 달랑 14명에 불과했다. 3개월 전 치러진 하틴 전투에서 병력 2만명과 기사 2,000여명을 상실하는 완패를 당한 후 베이루트와 시돈ㆍ나사렛ㆍ티론 등 십자군의 근거지를 차례차례 정복 당한 뒤끝이었기 때문이다. 항복 직후 예루살렘의 2만여 주민은 공포에 휩싸였다. 자신들이 한 짓이 있었던 탓이다. 이슬람군도 이를 갈았다. 그럴 만했다.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1099년 6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 당한 4만여 무슬림과 유대인의 피가 무릎까지 고였던 원한이 뼛속에 맺혔기에. 기독교인은 얼마나 학살됐을까. 누구도 보복 당하지 않았다. 술탄 살라딘(Saladin)의 자비 덕분이다. 이집트와 시리아ㆍ팔레스타인과 예멘 땅까지 차지한 정복 군주 살라딘은 보복 대신 관용을 택해 포로들을 풀어줬다. 몸값을 받았다지만 고향까지 갈 수 있는 물과 식량까지 챙겨 기독교인들을 놓아준 살라딘에게 돌아온 것은 3차 십자군. 예루살렘 재함락에 격분한 교황과 유럽인들은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를 중심으로 편성된 새로운 군대를 내보냈다. 살라딘은 3차 십자군을 맞아 싸우면서도 리처드가 부상 당했을 때 의료진을 보내 신뢰를 쌓아 기독교인의 성지순례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휴전조약을 맺었다. 1187년 예루살렘의 평화와 공존으로부터 820년이 지난 오늘날, 살라딘이 베풀었던 자비와 평화는 찾을 수 없다. 피의 보복만 되풀이될 뿐이다. 국제유가에서 세계 평화까지 중동의 종교ㆍ민족 갈등에 위협 받고 있다. 인류의 미래가 살라딘식의 상호존중과 공존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