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2월1일] 호메이니의 귀환

[오늘의 경제소사/2월1일] 호메이니의 귀환 테헤란이 춤췄다. 시내를 가득 메운 200만명의 인파가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외쳤다. 1979년 2월1일 테헤란. 회교 지도자 호메이니가 16년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돌아왔다. 팔레비의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이란혁명에 겁을 먹은 것은 아랍제국. 회교혁명의 확산을 막자는데 아랍과 미국ㆍ소련이 따로 없었다. 수니파의 대타(代打)격인 이라크와 이란의 8년간 전쟁은 이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차단은 고사하고 혁명열기는 중동을 넘어 북아프리카와 구소련 등 이슬람 전역으로 퍼졌다. 미군 병사가 연일 죽어나가는 이라크 전역도 이란혁명의 연장선 중 하나다. 이란혁명의 숨겨진 배경은 경제난. 1974년 원유수출 200억달러, 성장률 42%를 기록하고도 이란은 곧 경제난국에 봉착한다. 1975년에는 190억달러의 원유를 수출하고도 재정적자 21억달러를 기록했다. 외국 빚도 12억달러나 들여왔다. 1977년 성장률은 -17%로 떨어지고 물가상승률은 50%로 치솟았다. 막대한 오일달러가 도대체 어디로 갔기에…? 절반 이상이 미국과 영국의 무기상에 들어갔다. 70년대 중반 이란의 무기수입액은 500억달러에 달한다. 미국은 NATO와 이스라엘에도 판매를 거부한 최첨단 F14전투기까지 이란에 넘겼다. 다음으로 큰 지출은 팔레비와 측근의 계좌로 흘렀다. 잘 나갈 수 있었던 경제를 망친 것은 부패와 국제무기상에 놀아난 지나친 군비확장 탓이다. 20세기 이후 발생한 모든 혁명에는 외세와 결탁한 지도층의 부패라는 동일한 궤적이 나온다. 이란혁명을 잉태한 갈등은 과연 풀렸을까. 얼마나 더 많은 피가 흘려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테헤란의 춤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 입력시간 : 2005-01-31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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