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토요 Watch] 살아남은 자의 슬픔… 예술로 보듬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분노 그림으로 끄집어내

상처 받은 영혼, 위로를 부탁해

갑작스런 상실·우울감 지속 땐 PTSD 후유증

예술치료 아동에 효과… 성인 심리정화 유도도


"남의 일 같지가 않아요. 내 아이가 저 배 안에 있는 것도, 내가 안산 주민인 것도 아닌데. 문득 멍해지고 또 울컥 화가 치밀고 밤에는 잠도 설칩니다. 자식 키우는 사람이라 그런지, 내 일처럼 여겨져서요."

50대 초반의 임원급 회사원 조진욱(가명)씨는 이 말을 하면서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 40대 후반의 공무원 최주혁씨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50대 주부 이순덕씨는 "가슴이 아파서 뉴스를 보기가 무섭다"며 "조용한 집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 것에도 섬뜩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건이 터진 지 열흘째. 실종자 구조작업은 여전히 난항을 거듭하고 이를 지켜보는 전국민의 분노는 거대한 상실감과 우울감을 형성해 '집단 트라우마'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이에 경기도와 안산시는 사고 희생자와 가족·시민 등의 심리 건강을 위한 통합재난심리상담소를 23일 설치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전쟁이나 9·11테러처럼 분명한 적(敵)이 있어 발생한 것이 아닌 탓에 심리적 막막함과 자책감은 돌파구를 찾기가 더 어렵다. 이럴 때면 종교에 의지하거나 정신과 치료나 심리 상담을 하는 게 통례다. 하지만 예술의 힘을 통해 이 같은 심적 고통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예술치료는 우뇌를 자극해 불안심리를 창조적이고 긍정적으로 순화해 치유효과를 얻는다. 특히 '집단적' 심리 장애를 치료하는 데는 일반 상담심리치료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예술치료는 연주하고 감상하는 음악치료, 그림으로 표현하고 해소하는 미술치료, 몸의 움직임으로정신을 치유하는 무용치료, 역할 수행으로 무의식을 교정하는 연극치료 등 다양하다.

한국음악치료사협회에 따르면 지난 15년간 배출된 음악치료사 자격증 취득자는 1만5,000명 이상이다. 한국미술심리치료협회가 지난 10년간 배출한 미술치료사도 1만명 이상이나 치료 전문성을 가진 미술임상치료사는 1,400명 수준이다. 예술치료는 재난과 사고뿐 아니라 학교폭력·가정폭력·치매 등 다양한 분야에 효과를 보여 주민센터·복지관 등을 중심으로 수요가 늘고 있다. 적절한 시기의 예술치료는 일상으로의 회복을 앞당길 수 있다.

특히 보완대체의학요법의 하나인 '미술치료'를 통한 트라우마 극복이 큰 관심을 끌고 있다. 트라우마 상태가 지속될 경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는 후유증을 겪게 되는데 특히 이 분야에 미술임상치료가 큰 효과를 보이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미처 언어화하지 못했던, 그래서 깨닫지도 못했던 내면의 고통을 끄집어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화가들은 작품활동을 통해 심리적 정화 과정을 경험하는데 대표적인 작가로 독일 출신의 오토 딕스(1891~1969)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딕스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년간 총알이 빗발치는 악몽을 꾸며 전형적인 PTSD를 경험했다. 이후 그는 전쟁을 지나칠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동판화 연작 '전쟁'과 종교적 분위기를 가미한 표현주의 그림 '전쟁제단화' 등을 통해 스스로 트라우마를 극복한 동시에 감동을 남겼다.


현대미술가 이수경의 경우 '매일 드로잉'이라는 수백점의 시리즈 작품을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전에 선보인 바 있다. 이 작가는 "15㎝ 지름의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뭐든 채워 그리는 '만다라 미술치료법'이라는 게 있어 수년간 매일 그렸더니 우울감이 해소되고 자존감이 높아졌다"며 "심각한 병증의 경우 전문가의 치료가 필요하지만 가벼운 증상에는 이런 그림치료를 시도해보는 것도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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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이용한 심리치료는 예전부터 있었으나 1961년 미국에서 '아트테라피(Art Theraphy)'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체계화됐다. 우리나라에는 1990년대에 유입돼 민간기관에서 '미술치료 자격증' 과정을 이수한 사람이 1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의료계와 손잡고 본격 '미술치료'를 시행한 것은 최근의 일로 김선현 차의과학대학교 미술치료대학원 교수가 2003년 성폭력 피해 환자들을 대상으로 PTSD 임상미술치료를 시작했다.

미술치료는 피해 인지가 부족한 아동이 주 대상자이나 어른들의 심리치료에도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2010년 구제역 살처분에 참여했던 공무원과 국가 위기상황에 동원됐던 군인들은 죽인 수백마리의 돼지들이 다시 기어나오거나 목을 비틀어 죽인 닭이 꿈틀대는 등의 착시·악몽, 동물 울음소리가 들려 잠을 못 자는 환청, 고깃국을 못 먹는 등의 섭식장애를 토로해 미술치료를 받았다. 연평도 포격 사건 때 찜질방으로 피신했던 어린이들도 미술치료를 받았다. 당시 어린이들은 검은색 배경에 빨간색 불길이 화면을 뒤덮은 그림, 땅이 갈라지거나 동네가 불타는 그림, 그 속에서 무기력하게 빠져나오는 자기 자신 등을 그림으로 표현하며 심각한 불안증상을 보였다.

미술치료는 미술활동으로 인한 진단과 치료 과정으로 이뤄진다. 우선 그림검사를 통해 비언어적 의사소통 방식의 심리 진단을 한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격한 감정을 그림으로 끌어내는 방식이다. 주어진 주제에 대한 그림을 보고 공간 이용, 대상 표현, 재료 선택, 색채, 그림 내용 등을 분석하는데 대상자의 연령·환경·개별특성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돼야 한다. 치료 과정은 미술활동을 통해 스스로 억제했던 감정, 상실·왜곡된 생각을 표현하게 함으로써 정서적 정화기능을 유도한다. 감정의 뇌인 우뇌를 활성화 시키는 방식이라 불안감과 긴장감 해소, 창조활동을 통한 성취감 향상 등을 얻을 수 있어 특히 PTSD에 유용하다.

증세가 심각한 경우에는 반드시 의사나 전문가의 미술치료 지도가 필요하지만 이번 세월호 사건처럼 간접 경험으로 인한 우울감의 확산에는 '자가미술치료'나 '위로가 되는 그림 감상' 등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번 세월호 침몰 관련 피해자들을 위한 PTSD 전문치료를 지원하고 있는 김선현 차의과대학 미술치료대학원장은 위로와 치유가 되는 명화를 추천했다.

미국 여성화가 메리 카사트의 '젊은 어머니'는 갓난아이를 안은 어머니의 일상을 평범하게 그렸다. 어머니의 애정표현은 과하지 않고 그저 생활의 단편임을 보여주지만 어머니와 아이의 정서적 공감만은 섬세하게 포착했다.

영국의 풍속화가 프레데릭 모건은 즐겁게 노는 아이들을 주로 그렸다. '괜찮아'라는 그림은 인형을 망가뜨린 동생을 언니가 위로하는 장면이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위로를 위해 먼저 손내밀 수 있는 용기를 북돋우는 그림이다.

종교화 또한 보는 것만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예수가 어린 양을 이끄는 기독교 성화나 관세음보살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손 내미는 '수월관음도' 등은 인간을 초월한 신(神)적인 힘이 아이들을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는 그림들이다. 김선현 교수는 "이번 세월호 사건은 피해자 상당수가 자식 같은 아이들이라는 점에서 전국민이 부모의 입장에서 동병상련으로 괴로워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술작품에 감동하는 것은 그림의 색이든 구도든 작가의 삶이든 공감 가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며 "참담한 사고에 함께 슬퍼하는 것을 넘어 트라우마로 커지는 것은 자신에게도 과거 비극적 사건의 여파가 잠재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으므로 그 원인을 차분히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예술치료는 초기 단계라 아직까지는 정부 차원의 체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민간 주도로 자격증 발급이 이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증일 경우 반드시 의료진이나 임상치료전문가의 진단이 필수고 전문성 인증을 위한 국가의 자격증 관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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