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경제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가운데 북핵 위기 재발, 세계 경제 둔화 가능성, 부동산 시장 불안 등 위험 요인이 산재해 있습니다. 지난 97년 외환위기 당시에도 경험했듯이 레임덕이 올 때 정부의 관리 능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정치적 외풍을 덜 받는 경제부총리를 중심으로 위험관리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구현(60) 삼성경제연구소 소장은 “대선 자체가 경제 리스크 요인은 아니지만 선거가 과열될 때는 사회 불안이나 정치권의 인기영합 정책으로 경제가 흔들릴 수 있다”며 “외부 충격에 제대로 대응하는 능력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한국 경제의 최대 문제는 불안한 노사 관계와 불법 노동운동”이라며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는 법치질서의 확립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정 소장은 외환위기 이후 기업정책에 대해 “자동차에 비유하면 성능 좋은 브레이크만 달았을 뿐 엔진 출력을 높이는 데는 소홀했다”고 비판했다. 과거 그룹 중심의 경제 성장 과정에 대해 부작용만 강조하다 보니 지나친 규제로 신규 사업과 투자가 저해돼 잠재성장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선거관리위원회의 역할이 선거 과정에서 불법 선거 감시인 것처럼 공정거래위원회도 시장에서 불공정거래 행위를 규제하는 데 그쳐야지 지배구조를 이야기하는 것은 월권 행위”라고 주장했다. - 올해 경제의 여러 위기 요인 가운데 가장 신경 쓰이는 요인은 무엇인지요. ▦세계 경제의 경우 미국 경제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는 몇 달 전 3%에서 최근 2.5%로 떨어졌지만 일본이나 유럽연합(EU)이 괜찮아 우려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보입니다. 국제 유가도 떨어지고 환율은 경상수지 적자 등의 여파로 엔화나 위안화보다는 달러화 대비 강세 속도가 약화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문제는 가능성은 적지만 부동산 가격이 급락하면 가계부실, 금융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인데요. 정부는 이미 나온 부동산 대책을 지켜봐야 합니다. 정부가 처음에는 중과세로 특정 지역의 부동산을 잡으려다 공급확대 정책을 소홀히 했습니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다 보니 쓸 수 있는 정책을 다 썼는데 지금이라도 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는 조치는 최소화해야 합니다. - 최근 가계부실 우려 등으로 외환위기 이후 10년 만에 경제 위기가 재발하고 있다는 경고음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 외환위기는 말 그대로 ‘외환’ 위기였습니다. 지금은 외환보유액도 많고 금융기관도 건실합니다. 다른 분야의 위기 요인이 있다면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인한 가계 신용의 악화, 가계들의 채무 상환 능력 부실화 등입니다. 하지만 총 가계부채가 500조원을 넘었지만 명목 국내총생산(GDP) 비중의 62~63%로 안정돼 있습니다. 지난 2002년 카드 버블 때는 단기적인 신용판매 비중이 높았지만 지금은 주택담보대출 등 중장기성 비중이 높습니다. 위험한 단계는 아니고 경제를 위기로 몰아갈 다른 요인도 보이지 않습니다. - 임기 말 정부의 정책 과제는 무엇이라 보시는 지요. ▦ 정치적 외풍을 덜 받는 경제부총리를 중심으로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정책 목표를 위험관리에 둬야 합니다. 위기는 언제나 있게 마련이지만 이를 통제ㆍ관리하는 시스템이 미흡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미국의 경우 부시 대통령이 레임덕에 어느 정도 들어갔지만 양당제나 직업관료제가 자리를 잡아 경제는 안정돼 있습니다. 우리도 대통령 한 사람만 쳐다보는 구조를 고쳐야 합니다. - 가장 시급한 과제를 하나만 찍어보라 하면 무엇인가요. ▦바로 노사 문제 해결입니다. 미국과 영국 경제가 유럽 대륙쪽보다 잘 나가는 원인은 노동시장의 유연화 덕분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나라 일자리 창출이 안 되는 이유도 지나친 정규직 보호 때문입니다. 참여정부의 가장 큰 목표가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인데 비정규직 보호법안은 고용 감소만 가져올 것입니다. 임금 수준이 높은 상황에서 기업이 살려면 비정규직을 해고하거나 안 쓸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노동 3권은 보장해야지만 폭력ㆍ불법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강력 대처해야 합니다. 눈앞의 생산 손실은 물론 자본주의의 기본인 법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노동문제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야경국가 수준도 안 됩니다. 법과 질서가 무너졌는데 어떻게 시장경제가 잘 돌아가겠습니까. -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10년간 구조조정을 했는데 공과는 무엇이라 보시는지요. ▦ 긍정적인 측면은 일종의 강요된 세계화였지만 시장 개방으로 글로벌 스탠더드로 갔다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변한 게 기업입니다. 수익성 위주 경영, 글로벌화, 자본시장을 통한 규율 등을 받아들였습니다. 부정적인 측면은 지나친 충격을 받으면서 한국 경제가 보수화, 안정희구형이 됐다는 점입니다. 한국경제의 장점인 다이내믹(역동성)이 약화되면서 지난 2001년 이후 성장률이 4%대로 굳어졌습니다. - 정부가 4%대 성장은 나쁘지 않다고 말하지만 체감 경기는 냉랭한데요. ▦옛날처럼 7~8%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경제시스템만 바꾸면 성장률을 5~6%로 올릴 수 있습니다. 경제 활성화 핵심은 소비진작과 규제 완화 등 2가지입니다. 수출 중심으로 성장하다 보니 소비와 일자리 창출이 부진하고 소득도 제자리 걸음입니다. 소비 진작을 위해서는 우선 조세 부담률을 낮춰 구매력을 높여야 합니다. 또 하나는 규제 완화입니다. 외환위기 이후 주요 기업 정책의 방향은 상호보증 및 상호출자 금지 등을 통해 그룹 체제를 약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경제의 주요 성장동력인 반도체ㆍ조선 등은 그룹 체계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지금은 기업을 자동차로 치면 브레이크만 강하게 하고 엔진은 내버려둔 꼴입니다. - 공정위는 국내 대기업 때문에 중소기업이 못 큰다고 비판합니다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 권력은 선거를 통해, 경제 권력은 시장에서 나옵니다. 선거와 시장을 각각 감시하는 게 선관위와 공정위 입니다. 선관위가 정당에 대해 지배구조를 강요하면 얼마나 웃기는 게 됩니까. 공정위도 담합이나 우월적 지위 남용 등 시장에서 불공정거래 행위를 규제하는 데 그쳐야 합니다. 지배구조나 경제력 집중 문제는 공정위가 할 일이 아닙니다. 자본시장에서 투자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출총제도 기업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출자를 많이 하면 주가가 떨어지면서 자본시장에서 자연스레 규율 할 수 있습니다. -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대해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반대 목소리도 만만찮습니다만. ▦정부가 앞으로 3~5년 내로 FTA를 체결하겠다는 국가는 40~50개에 이릅니다. 한ㆍ미 FTA가 쟁점화된 이유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 영향력이 컸던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FTA는 개방의 잣대이며 개방은 생존의 길이입니다. 중국은 앞으로 15~20년 내로 세계 2대 강국으로 올라설 것으로 보이며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입니다. 살 길은 경쟁 촉진을 통한 경제 효율화이며 가장 좋은 방법은 개방입니다. 농수산물 등은 피해를 보겠지만 모든 부문에 이익이 되는 협상은 있을 수 없습니다. 경제를 개방해서 소비수준, 국가 효율이 높아지고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는 큰 그림을 봐야 합니다. 한ㆍ미 FTA는 반드시 성사돼야 하며 국운이 달린 문제입니다. 이미 진행 중인 협상에서 실패하면 미국보다 한국의 상처가 훨씬 큽니다. 미국의 통상 압력이 더 커지고 한국의 개방 의지에 대해 다른 나라들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한국의 개방 정책 자체가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일본ㆍ중국ㆍ EU 등 다른 나라와 FTA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요. ▦협상의 어려움으로 따지자면 EUㆍ일본ㆍ미국ㆍ중국 등의 순입니다. EU와는 농산물 문제가 크지 않으니 별 문제가 없고 일본은 수산물 부문에서 약간 문제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은 농산물ㆍ서비스 부문이 강합니다. 중국은 농산물, 저가 공산품이 강해 선진국과 FTA를 체결한 뒤 가장 나중에 협상을 해야 합니다. - 제조업은 글로벌화 돼 있지만 국내 서비스 산업은 경쟁력이 취약한데요. ▦역시 개방이 안 됐기 때문입니다. 지난 90년대 초 유통업을 개방할 때 대한상공회의소가 ‘한국 유통업체가 문 닫는다’고 난리를 쳤지만 결과는 어땠나요. 오히려 월마트, 까르푸가 국내업체에 밀려 철수했지 않습니까. 시장 개방한다고 한국의 의료, 교육 산업이 망할 리가 없고 더 효율화될 것입니다. 특정 산업을 개방한다고 큰일날 것처럼 말하는 분들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4만달러로 가기 위해서는 서비스업을 과감하게 개방해야 합니다. 약력 ▦47년 서울 출생 ▦69년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73년 미 미시간대 대학원 박사 ▦77년 미시간대 객원교수 ▦78년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92년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원장 ▦97년 연세대 경영대학원장 ▦2003년 삼성경제연구소 소장 삼성경제연구소는 '한국대표 싱크탱크'
경제이슈·트렌드등 시의적절하게 발굴 지난 86년 출범한 삼성경제연구소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싱크탱크다. '세리(SERI)'라는 애칭에서 알 수 있듯 '요술공주 세리'처럼 궁금한 경제 이슈나 특정한 산업의 트렌드 등을 시의 적절하게 발굴, 국내 최고의 민간연구소로 성장했다. 이 연구소의 회원은 125만명으로 국내 연구소 가운데 가장 많다. 일반 경제인은 물론 오피니언 리더, 정부 부처, 정치권 등에도 중요한 '지식 창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실제 발 빠른 이슈 선점으로 통상적인 경제 문제는 물론 국제 어젠다마저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대표적인 게 참여정부 출범 직전인 지난 2003년 2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제출한 '국정과제와 국가운영에 관한 어젠다'라는 보고서다. 400여쪽에 달하는 이 보고서에서 삼성연의 연구진 70여명은 국가운영의 과제를 광범위하게 제출했다. 경제 문제에 의견을 내는 데 집중하는 LG경제연구원이나 현대경제연구원 등 일반 민간연구소와 대비되는 대목이다. 이후 삼성연은 동북아 중심국가론, 2만달러론, 산업 클러스터(집적단지) 등 굵직굵직한 국가 어젠다를 선도적으로 제출했고 실제 참여정부의 국정 운영에 반영됐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에도 '강소국론'을 제기, 국가적인 화두가 된 바 있다. 강소국론은 이건희 삼성 회장이 먼저 제기, 삼성연이 이론적으로 보완한 것으로 그룹 차원의 화두가 국가적인 이슈로 된 대표적인 사례다. 정구현 소장은 "새 대통령이 누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 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연구소 내에서 작업 중"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삼성연의 독특한 위상 때문에 일부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재벌과 정부간 유착"이나 "특정 연구소의 독주"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삼성연의 이슈 선점 능력이나 보고서의 질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진보 세력내에서 "우리에게는 왜 세리가 없나"는 한탄이 나올 정도다. 삼성연의 이 같은 능력은 우선 방대한 인력 풀에서 나온다. 삼성연의 전체 연구원은 박사급 70명을 비롯해 총 120명에 이른다. 박사급 인력의 경우 다른 민간경제연구소의 5배 이상으로 대표적인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보다 10여명 이상 많다. 지명도가 높아지면서 기부금으로 충당하는 다른 연구소와 달리 컨설팅 사업과 'SERICEO' 사업으로 각각 200억원, 100억원을 벌어들여 거의 자체 수익으로 예산을 충당하고 있다. 지난해 출범 20주년을 맞은 삼성연의 다음 목표는 '동아시아 최고의 싱크탱크'다. 적극적인 해외 진출로 글로벌 연구소로 거듭나겠다는 것이다. 이 연구소는 현재 한국어 사이트인 'seri.org' 이외에도 'www.seriworld.org'(영어), 'www.serijapan.org'(일본어), 'www. serichina.org'(중국어) 등 3개의 해외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SERIJapan 홈페이지는 수천 건의 보고서와 동영상 콘텐츠를 제공, 지난해 4월 일본의 유명 포털 'Allabout'로부터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SERIChina 홈페이지는 '차이나 비즈니스 포커스', 'SERIChina 리뷰', 차이나 리포트 등을 제공한다. 중국 현지 연구소인 '베이징대표처'가 작성한 것이다. 연구소는 현재 일본ㆍ인도 등에서 현지 연구소를 설립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정 소장은 "지난해는 연구소의 비전 1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이라며 "삼성전자가 글로벌 기업이 된 것처럼 세계적 수준의 연구소가 되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