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다산·초의·추사가 되살린 우리 茶의 멋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정민 지음, 김영사 펴냄)<br>철저한 역사적 고증 통해 수십년간 반복되어온 학술적 오류 바로잡아



동서양을 막론하고 차(茶)는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음용 문화이자 상호 교류를 원활하게 하는 효율적인 네트워크 수단이었다. 기름진 음식을 많이 섭취하는 중국은 차를 마셔 체내 지방 축적을 완화했으며 대륙의 문화가 전파된 일본에서도 차 문화가 발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승려와 화랑들이 수행하면서 차를 마시는 풍속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며 고려 시대에는 왕실ㆍ귀족ㆍ사원 등에 차가 유행처럼 번져 많이 보급됐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차 문화는 조선조로 접어들면서 거의 사라질 위기에 놓인다. 주로 공물로 바치는 차는 백성들에게 차례가 돌아올 만큼 생산되지 않았고 일부 집권층을 중심으로 연행 길에 사온 중국 차를 마시는 호사스러운 취미에 그쳤다. 결국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차는 배탈이 났을 때 먹는 상비약이었을 뿐 기호음료로서 기능은 갖지 못했다. 고전문학자인 저자는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 등 세 인물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차 문화를 다채롭게 조명했다. 잊혀졌던 차 문화가 새롭게 조명받게 된 것은 18세기 들어서부터다. 부안현감 이운해는 고창 선운사 차밭에서 찻잎을 따와 7종 향차를 만들었고 그 방법을 '부풍향차보'란 기록으로 남겼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후 진도로 귀양 온 죄인 이덕리가 '동다기'란 저서를 지었다. 초의가 '동다송'에서 인용한 '동다기'는 다산이 쓴 것으로 오인됐던 기록이기도 하다. 차에 관해 문외한이었던 저자는 강진에서 '동다기'를 찾아내면서 이를 계기로 차 문화 연구에 깊이 빠져들게 됐다. 두 권의 저술은 수 백 년 동안 잊혀졌던 차 문화의 재발견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차 문화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이가 바로 다산(茶山) 정약용이었다. 다산은 18년 동안의 유배 생활(1801~1818) 중 11년 정도를 전남 강진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에서 기거했는데 오랜 유배 생활과 학문 연구로 인해 쇠약해지고 병든 몸을 치료하기 위해 차를 즐겨 마셨다. 다산초당 앞마당에는 편평하고 넓직한 돌이 하나 있는데 다산이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찻불을 끓인 '다조(茶竈)'로 전해진다. 다산은 백련사 승려들과 교류하다가 주변에 야생 차가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승려들에게 차 만드는 법을 알려줬고 이후 다산의 제다법은 다른 사찰의 승려들에게 퍼져나가게 됐다는 것. 당시 다산이 마셨던 차는 지금의 녹차와는 다른, 찻잎을 여러 번 찌고 말려 차의 독성을 누그러뜨린 뒤 가루를 내고 돌샘물에 반죽해 작은 떡처럼 만든 '떡차'였다. 한국의 차 문화는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에 이르러 꽃을 활짝 피웠다. 24세 때 다산을 찾아가 차를 배운 초의는 장시 '동다송'을 통해 차의 역사와 우리 차의 효용, 차를 마시는 절차와 방법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전다박사(煎茶博士)'로 불린 초의의 존재를 더욱 빛낸 것은 바로 추사 김정희다. 초의차를 접하고 단번에 매료된 추사는 초의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차 이야기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 차 문화를 역사적으로 고증하면서 한국 차 문화의 원형을 고찰하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기존 저술에서 수십 년간 반복돼 온 학술적 오류를 바로잡았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저자는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한국 고유의 차 문화를 종합하는 전망을 수립할 때가 됐다"며 "자료를 집성해서 묵직한 자료집으로 간행하는 한편 차 문화 역사의 전체적 전망을 세우는 작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3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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