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금융실명제의 교훈/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시론)

최근 대통령 선거전에 돌입한 각 정당들은 너도나도 금융실명제의 개선에서부터 폐지에 이르는 다양한 공약들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5월 정부의 금융실명제 개선방안 발표이후 맞이하는 최근의 움직임을 보면서 도대체 금융실명제가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그리고 잘못이 있었다면 이 경험을 통해 향후 경제개혁 추진에 대해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금융실명제 개혁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경제제도 개혁과 정치·사회개혁을 혼돈했다는 점이다. 경제제도 개혁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일반적으로 재산권제도 정비를 통해 재산권에 관한 불확실성을 제거함으로써 경제내의 거래비용을 최소화하는데 있다. 재산권 제도에 대한 불확실성을 높이지 않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정치·사회적 개혁은 불가피하게 과거를 묻게 되며, 이는 결과적으로 재산권에 대한 불확실성을 높여 거래비용을 증가시킴으로써 지속적인 경제적 부담을 초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금융실명제의 목적이 공평과세를 위한 제도정비라면 비실명거래자에 대한 고율과세 부과나, 실명거래자에 대한 종합과세 감면 등으로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금융실명제는 실명화를 촉진하기 위해 3개월간의 비실명인출 금지, 3개월 이후의 인출에 대한 과징금 부과, 금융거래내역의 국세청 통보를 규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부정축재 및 뇌물수수 적발의 일반적 수단이 됨으로써 경제개혁을 넘어 정치·사회개혁으로 확대되었다. 물론 금융실명제는 예금비밀 보장을 규정하고 있으나, 불행하게도 위의 실명화 촉진책들은 이미 비밀보장 장치의 신뢰성뿐 아니라 그 후 지속적으로 천명된 정부의 예금비밀 보장의지에 대한 신뢰마저도 훼손시킨 것으로 보인다. 금융재산권에 관한 불확실성 증가가 궁극적으로 경제적 부담을 발생시킴을 사전에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데 따른 결과이다. 만일 금융실명제의 문제점이 이렇다면 그 경제적 효과는 어떠했는가. 금융실명제의 경제적 부작용은 두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 단계는 실명제 직후 일정기간 예금동결 및 금융거래 제약에 의한 금융경색 효과이며, 다음 단계는 경제주체들이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실명제를 회피하거나 금융재산권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경주함에 따라 발생하는 실질거래비용의 증가효과이다. 필자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전자의 부작용은 실명제실시 전후에 통화유통속도의 하락에 따른 금융경색으로 나타났으나, 당시 경기회복에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적절한 통화공급 대응으로 이를 잘 극복하였다. 그러나 후자의 부작용은 예금비밀보장이 확고히 정착되어 금융재산보호에 대한 신뢰가 충분히 확보될 때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이며, 이런 부정적인 영향이 사라지는 날 금융실명제가 경제제도개혁으로 정착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금융실명제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우선 경제제도 개혁은 어떠한 경우에도 재산권제도의 훼손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과거의 경제적 행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매몰비용과 같기 때문에 그 성격상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정치·사회개혁은 본질적으로 과거를 묻게 되며 따라서 경제에 부담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거래비용의 최소화라는 경제제도개혁의 목적에 부합하는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백% 실명화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예금동결이니 과징금이니 하는 재산권을 훼손하는 방법으로 추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한가지는 금융실명제를 순수하게 공평과세의 기초 제도로 인식하고 가차명의의 경우 높은 세금부담을 지는 것 외에 일절 형사상 또는 재산상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예금비밀은 물론 재산권을 철저히 보장하는 길이 있을 것이며, 이 경우 1백% 실명화는 관행의 개선을 통해 장기적으로 정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하나는 거래비용의 부담을 무릅쓰고 1백% 실명화를 강력히 추구하면서 부작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아마도 경제를 더 걱정하면 전자를, 사회정의를 더 걱정하면 후자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물론 금융실명제 개혁을 어떤 형태로 추진할 것인가는 국민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든 정부는 국민재산권 보호자로서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아마도 금융실명제를 통해 잃은 가장 큰 손실은 국민재산권 보호자로서의 정부에 대한 신뢰가 크게 훼손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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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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