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은행장 잡아넣는다고 문제해결 됩니까?”/원로금융인 문상철씨

◎기간시설 한보,소생방안 도출 급선무/빅뱅보다 ‘안정된 사회’ 조성이 더 중요/물가상승률 높아 선진국과 같은 저금리 어려워□대담:이세정 정경부 기자 한보그룹 부도사태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따갑기만 하다. 특히 몇백만원을 빌리려고 해도 높기만 한 은행 문턱 때문에 고생하는 서민들은 한보그룹이 5조원 규모의 금융기관 자금을 제멋대로 갖다 썼다는 소식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때문에 금융기관이 5조원 규모의 돈을 이처럼 손쉽게 내준 배경에는 적지않은 의혹이 있을 것이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금융계에서 「대꼬챙이」로 많은 일화를 남긴 원로 금융인 문상철 전 은행감독원장(82)은 누구보다도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같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대꼬챙이로 유명 『거액 대출에 외압이 있는 것처럼 알려져 있고 검찰에서 이 부분을 수사하겠다지만 아무리 조사해봤자 소용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증거를 남기면서 압력을 넣겠어요. 또 은행장들 입장에서는 압력이 있었다고 얘기해봤자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고 더 어리석은 사람으로 낙인찍힐 판이니 압력의 실체가 드러나겠습니까.』 문씨는 지금 시점에서 외압 등 의혹을 파헤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정작 시급한 것은 뒷마무리를 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국가차원에서 보다 시급한 일은 5조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간 기간시설을 어떻게 되살리느냐는 것입니다. 기간시설이 잘못되면 결국 국민의 손실로 귀착됩니다. 지금 중요한 과제는 국가적 손실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문씨는 지난 35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행한 후 86년까지 반세기 넘게 금융계에 종사하는 동안 단 한번도 비리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던 대꼬챙이 금융인. 선린상고를 졸업하자마자 조선은행에 입행해 62년부터 67년까지 5년5개월 동안 은행감독원장으로 재임한 후 국민은행장, 조흥은행장을 역임하고 서울투자금융 초대 사장, 토지금고(현 토지개발공사) 초대 이사장, 신동아화재회장을 거쳐 삼삼투자금융회장 및 전국투자금융협회장을 끝으로 지난 86년 은퇴, 현재는 국민은행과 조흥은행 퇴직자들의 모임인 국은동우회와 조흥동우회 회장을 겸임하고 있다. 그러나 문씨가 주목받는 것은 그의 오래된 화려한 경력보다는 냉철한 금융철학 때문이다. 항상 명징한 상태에서 상황을 명쾌하게 분석, 대처해왔을 뿐 아니라 외부 압력에 대해서는 씨도 안 먹히는 것으로 유명했던 문씨는 끊임없이 금융비리가 터져 나오는 작금의 현실에 대해 할말이 너무 많았다. 『뇌물을 받고 대출해주는 금융인은 극소수에 불과해요. 그런데도 마치 금융계 전체가 썩어버린 것처럼 과장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본금이 9백억원에 불과한 한보철강에 5조원이라는 막대한 대출이 이뤄진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더구나 한보철강의 장래 사업성도 불투명했는데요. ○첫출발부터 잘못 『처음 출발이 잘못된 것 같아요. 초기 사업투자계획이 2조7천억이었다는데 도대체 자본금 9백억원짜리 회사가 처음부터 차입을 전제로 벌이겠다는 사업을 승인해준 게 말이 됩니까. 은행으로서는 처음에 발을 들인 후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1조원 정도만 돈이 들어가도 공장건설을 중단시킬 수 없게 됩니다. 공장이라는 게 완공되어 제대로 굴러가야 담보가치가 있는 것이지, 중도에 그만두면 고철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끝까지 자금을 대줘 공장을 완공시키지 않으면 그동안 들어간 돈을 모두 날리게 될 처지이니 계속 물려들어갔겠죠. 외부압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건 처음 문제고 일단 대출이 시작된 이상 공장이 완공될 때까지 밀어줄 수밖에 없는게 금융기관의 생리입니다. 출발점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죠.』 ―하지만 사업성도 불투명한 공장건설에 은행장이 단독으로 거액대출을 결정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건 거꾸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은행이 일단 대출을 시작했는데 중간에 기업이 부실해질 경우 은행장의 고민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부실해진 기업을 살리려면 계속 자금을 대줘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대출이 담보를 초과하게 돼 배임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지원을 중단하면 공장의 담보가치가 크게 떨어져 이미 나간 대출을 회수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기업을 살리자고 담보 이상으로 대출하자니 배임이고, 지원을 중단하자니 은행의 손해가 커지게 되므로 은행장은 잠을 못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공신력 영향없어 문씨가 국민은행장에서 조흥은행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지난 70년. 당시 조흥은행의 최대 골칫거리는 대성목재였다. 조흥은행의 당시 자본금은 40억원이었는데 대성목재의 결손액 규모가 40억원을 넘어 은행 자체가 거덜날 지경이었다. 대성목재 때문에 주야로 고민하던 문씨는 그러나 은행 자체적으로 구상한 처리방안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청와대 부실기업정리반이 마련한 방안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대성목재는 주인을 7차례나 옮겨다닌 끝에 급기야 95년에 문제의 한보그룹 계열사가 되었다. 관변의 탁상정책이 대성목재의 운명을 지금까지 떠돌이로 만들어 놓았다면 비약일까. 『당시에는 한 기업의 부실채권이 은행의 자본금을 넘어 생사를 좌우할 지경이었는데 이제는 다릅니다. 조흥은행의 경우 한보철강에 대한 대출이 5천억원 정도라는데 이게 모두 부실화된다고 하더라도 1년 결손액은 5백억원 정도로 자기자본 2조원의 2.5%에 불과합니다. 또 조흥은행의 연간 영업수익이 5천억원 정도니까 5백억원의 결손으로는 은행경영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은행의 공신력이 떨어질 요소가 별로 없어요. 제일은행은 최근 사고가 잇따라 타격이 좀 크겠지만.』 ○은행 거덜안난다 문씨는 이번 사건이 마치 몇몇 은행을 거덜낼 것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는 점을 언론이 바로잡아 줘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금융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정부 고위당국자들은 주장하고 있는데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 얘기예요. 국내 은행의 경영이 후진적이고 비능률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고금리를 많이 들고 있죠. 그렇다면 봅시다. 국내에 외국은행 지점이 50개 이상 들어와 있어요. 다 세계 일류은행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세계 일류은행들이 국내 은행보다 더 높은 금리를 받고 있어요. 능률적인 선진 경영체제를 갖춘 일류은행이라면 우리보다 금리가 싸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빅뱅이니 뭐니 떠드는 것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안정된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물가가 5∼6%씩 오르는데 금리를 외국처럼 낮출 수 있겠습니까. 또 수요자 중심의 금융시스템을 만든다는데 금융기관의 수요자가 대출고객만 있습니까. 예금고객도 서비스수요자 아닙니까. 수요자 중심의 금융체제를 만들면 금리가 낮아집니까. 경제와 사회를 안정시켜서 신용사회를 정착시켜야 금융산업이 발전합니다. 은행기법 운운할 때가 아니에요.』 ―요즘 은행장들에게 한말씀 해주시죠. 『무슨 말을. 요새 은행장들 실력있고 잘 해요. 무슨 일만 터지면 은행장들을 잡아넣곤 하는데 이렇게 해서는 근본적인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안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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