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하다. 구조를 기다리다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죄를 졌다. 무엇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에 울화가 치민다. 무책임한 보도로 혼선을 부추기고 희생자 가족을 울린 언론집단의 한 사람으로서 낯을 들기 어렵다. 가슴을 짓누르는 응어리와 분노, 자책 속에서 미래를 본다. 얼마 지나면 잊을 것이다. 단숨에 끓어올랐다 바로 식어버리는 양은 냄비처럼…. 어른들의 부주의와 잘못된 관행으로 어린 생명들을 떠나보낸 게 어디 한두 번인가. 그때마다 우리는 비겁하지만 편리한 도구인 망각에 기댔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미래가 지나온 시간과 운동성의 축적과 연장이라면 뻔할 뻔 자다. 다시금 이런 참사가 되풀이돼서는 안 되겠기에 제안한다. 4월16일을 국가재난일로 기억하자. 사고 하나에 감상적으로 과민 반응한다는 지적이 나온다면 그것은 모르는 소리다. 진도 여객선 참사는 단순한 '사고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깡그리 담겨 있기 때문이다.
참극의 싹은 정치권에서 키웠다. 엉터리 개조와 무리한 운항, 직원들의 사고 경고를 묵살한 채 사리사욕을 채운 청해진해운 오너 일가에 대한 5·6공 시절 권력의 비호가 대참사의 시작이다. 해수 마피아의 존재와 사고 발생 이후에도 복지부동과 오판, 늑장 대응으로 피해를 키운 공무원과 해양경찰, 잠수요원 500여명 '대기'를 '투입'이라며 생색만 내는 정부, 속보와 단독 경쟁에 빠져 재난 보도의 원칙을 도외시한 언론,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하기는커녕 분노로 들끓게 만든 고위 관료, 최소한의 직업 윤리와 의무를 저버린 선장과 선원까지 모든 게 허점투성이다.
진짜 문제는 현상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 우연히 악재가 겹친 게 아니라 겹겹이 쌓인 악재 자체가 한국 사회를 이루고 있다는 얘기다. 말도 안되는 참사, 비슷한 유형의 비극이 수없이 반복되는데도 고쳐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다 심각한 것은 학생들을 먼저 구출하고 숨져간 여승무원(고 박지영씨) 같은 몇몇 의인(義人)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장삼이사(張三李四)가 나와 내 가족만 살고 보자는 이기주의와 무책임, 보신의 습성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유대계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간파한 '악의 평범성'에 빗대자면 우리 국민들이 '사회적 병리의 보편화 함정'에 빠진 채 망각의 세월을 거듭하고 있는 셈이다.
모두가 원하는 잘사는 나라와 경제 성장도 이런 환경에서는 어렵다. 1974년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스웨덴의 군나르 뮈르달은 쇠퇴의 원인을 지나친 개인주의화로 인한 사회 시스템의 붕괴에서 찾는다. 우리가 진도 여객선 참사를 계기로 구조적 문제를 개선해나갈 수 있다면 정체의 늪에 빠진 경제도 잃어버린 속살(성장 잠재력)을 채워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이들을 사지로 내몰고 살아남은 자들은 책무가 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반성하고 문제점을 해결해나기기 위해 사고의 원인과 발생, 처리까지 복기(復棋)가 필요하다. 되짚어보되 서둘지 말자. '4·16 국가재난일'을 정해 해마다 아이들에게 죄를 비는 심정으로 우리의 잘못을 조금씩 고쳐나가자. 아이들이 죽어가면서 만들어준 반성의 기회까지 놓쳐버릴 수는 없다. 가슴에 자리 잡으려는 응어리와 죄책감은 발전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참사 엿새째부터 노란 리본을 달았다.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합쳐지면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혹자는 늦었다고 하고 혹자는 노란색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지만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색채론에서 노란색이 빛에 가깝다고 봤다. 국민들의 간절한 마음이 모여 부디 꺼져가는 아이들의 생명에 빛이 내리기를…. 해마다 노란 개나리 필 무렵마다 아이들에게 무릎 꿇어 우리의 죄를 참회하고 빚을 갚아나가리라 다짐하며 '4·16 국가재난일' 지정을 다시금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