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0년 1월 6일 서울 관철동 대왕빌딩의 럭키그룹 본사 회의실. 구철회 럭키화학 사장이 단상에 올라 짧게 말했다. “저는 물러납니다. 돌아가신 회장님의 뜻을 펼쳐나가는데 유일한 적임자로 구자경 부사장을 추대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경영권 갈등에 대한 세간의 일부 우려를 말끔히 씻어버리고 국내 대기업사상 첫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사흘후 열린 합동이사회에서는 구 부사장을 만장일치로 회장으로 추대하고 그룹 운영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조용하지만 빠르게 세대교체를 마무리 지었다. 세계화·성장돌파구열어
해외합작…사업 다각화…R&D 투자
70년 금성사 기업공개…기술합작등 잇단추진
74년 럭키화학, ㈜럭키로 개명 여천공장 건설
구자경 회장(현 LG그룹 명예회장)은 취임식에서 “급속한 확대보다는 내실 있는 안정적 성장을 추구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룹 내부에서는 준비된 회장다운 발언으로 평가됐다. 사실 구 명예회장은 20년 동안 고된 경영수업을 받았다. 덕분에 어느 공장에 가도 그의 손때가 묻지 않은 기계가 없을 정도였다. 구 명예회장은 취임과 함께 호남정유, 한국콘티넨탈카본 등의 투자에 따른 자금 압박에 부딪혔다. 그의 선택은 기업공개를 통한 자본과 경영의 분리였다. 취임 첫해인 70년 럭키화학과 금성사를 공개하고 74년 금성통신, 76년 반도상사, 금성전기, 범한화재, 78년 금성계전 등을 차례로 공개했다. 또 해외자본 유치 및 기술 합작 등을 잇따라 추진하며 합작사만 20개사에 이를 만큼 국내 기업의 세계화를 선도하며 성장의 돌파구를 열었다. 구 명예회장은 2기 럭키그룹을 출범시키며 조직의 운영을 회의체로 바꿨다. 훗날 회의체 중심의 경영방식은 자율경영이란 LG 고유의 경영형태의 모태가 된다. 구 명예회장이 그룹 경영을 맡은지 4년째였던 지난 94년 2월. 럭키화학은 ㈜럭키로 사명을 바꾸고 세계적인 수준의 종합화학회사로 성장하기 위해 울산공장을 건설하고 여천공장 건설에 돌입했다. 당시 대표이사이던 허신구 사장(현 GS리테일 명예회장)의 주도 아래 럭키의 제품은 국내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아직도 합성세제의 대명사로 불리는 ‘하이타이’가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같은 해 7월 럭키는 전라남도 여천 석유화학단지에 석유화학 관련단지 조성 사업계획을 승인받고 종합석유화학회사로 발돋움 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1단계 사업인 PVC레진 에 이어 ABS, 글라스파이버 공장을 준공하며 석유화학 기업으로 면모를 갖췄다. ‘플라스틱 빗’으로 출발했던 LG가 24년만에 석유화학 원료생산의 꿈을 일궈낸 셈이다. 구평회 사장을 사령탑으로 바꾼 호남정유는 70년대초 서울 본사 빌딩이 들어있던 대연각빌딩 화재, 여수공장 화재 등으로 아픔을 겪지만 꾸준한 확장과 함께 LPG, 폴리프로필렌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는데 성공했다. 석유화학사업이 70년대 첫 발을 내디뎠다면 전자사업은 이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73년부터 구미, 창원, 평택, 구로 공장이 잇따라 건설됐다. 특히 75년 설립된 구미 TV 공장은 3차례에 걸친 증설을 추진하며 79년부터 히타치와 기술제휴로 컬러TV를 생산한다. . 연구개발(R&D) 투자에도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76년 민간기업으로는 처음 금성사가 중앙연구소를 설립하고 79년 충남 대덕연구단지에 석유화학 중앙연구소를 설립해 국내 화학기술을 선진국 수준으로 높여 나갔다. 사업영역 확장도 계속됐다. 70년 범한화재를 인수해 보험업에 진출하고 금성전기와 금성전공을 설립, 방송통신장치 및 무선통신 분야를 전문화하며 LG의 이동통신사업 및 첨단 IT산업의 기반을 만들었다. 구 명예회장이 취임한지 10년이 지난 1980년. 럭키그룹은 23개 계열사와 5만3,8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국내 최정상 기업으로 올라서게 된다. 70년 520억원에 불과하던 그룹 총 매출액은 79년 1조2,280억원으로 불어났고 미국의 포천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중 13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30돌 LG화학 여수공장 초기멤버들
“개척자로서 초심 잃지않을것”
“초기엔 플라스틱 원료인 PVC레진을 생산하기 위해 한밤중에 불로 일일이 녹이면서 작업하느라 고생깨나 했죠.” 올해로 30년만을 맞는 LG화학 여수공장의 공채 1호인 이재표 PVC 혁신파트 실장은 “여수 겨울날씨가 원래 3~5도 정도인데 76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며 갖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생산 초기의 어려움을 이렇게 회상했다. 지난 77년 11월15일 첫 가동에 들어간 LG화학 여수공장이 짧은 기간에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메카로 우뚝 선 데는 이 같은 현장인력들의 피땀어린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성춘 LDPE생산팀 실장은 “76년 당시 파이오니어(개척자)라는 글자가 새겨진 러닝화에 장화 차림으로 교육을 받는데 양철지붕에서 나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 강사 목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최 실장은 “당시 하숙집 주인이 럭키 다닌다고 하니 치약이나 칫솔 좀 구해달라고 부탁해 난처했던 적도 있었다”며 활짝 웃었다. 처음 공장이 돌아갈 때만 해도 물이든 전기든 제대로 갖춰진 게 하나도 없었다. 때문에 공장 가동시간을 줄이는 비상조치를 취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78년 입사했던 황규명 열병합 실장은 “태풍이 불면 전력공급이 제대로 안돼 눈물을 머금고 공장 가동을 줄여야만 했다”고 말했다. 지난 30년을 한결같이 여수공장을 지켜온 생산초기 멤버들은 한결같이 “아직도 준공 당시의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면서 “LG 여수공장이 30년을 지나 60년, 100년까지 계속 커나갈 것으로 믿는다”고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