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에게 육전 이외에서도 매매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許市民六廛外, 通共和賣).’ 조선왕조실록 정조편 신해년(1719년) 1월25일자의 일부다. 조선 상업사 최대사건이라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이 시행된 것이다. ‘통공’은 진입장벽 철폐. 비단과 종이 등을 국가에 대는 육의전을 제외한 품목의 자유로운 매매 길이 열렸다. 반면 시전은 된서리를 맞았다. 시전이란 물자를 국가에 납품하는 대가로 종로거리에서 금난전권(禁亂廛權), 즉 독점적인 상업권을 행사하던 상인 집단. 반관반민의 조달청격이다. 신해통공의 배경은 크게 두 가지. 첫째는 물가상승이다. 시전상인들이 영세상인들을 ‘난전’으로 몰아 물건을 압수하겠다며 협박해 헐값에 사들여 백성들에게는 비싸게 파는 통에 민원이 빈발하고 물가가 치솟았다. 두번째 이유는 왕권 강화. 유력가문에 들어가는 시전상인의 정치자금줄을 차단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독점권을 잃은 시전은 신해통공의 발의자인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의 출근길을 가로막고 철회를 요구했지만 정조는 밀고 나갔다. 신해통공 2년 후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찾기 위한 화성(수원) 행차길에 놓을 배다리(舟橋) 가설에 동원될 선박으로 경상(京商ㆍ시전이 아닌 서울상인) 보유 선박을 지목하고 그 대가로 세곡선(쌀 운반선) 운영권을 부여했다. 재정수입원을 시전에서 경상으로 대체한 것이다. 신해통공은 조선 후기 상업 발달을 낳았다. 자본주의 발달의 맹아였다는 학설도 있다. 문제는 개혁의 성과가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 성장한 상업세력이 권문세가와 결탁해 정치권력과 상업의 독점구조를 낳았다. 뒤틀린 개혁의 결과는 세도정치와 국가재정 붕괴, 망국이었다. 개혁과 수구의 갈등구조 속에 멍든 나라…. 옛날 일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