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회장님,희망이 있습니다”/“항공기 비행때 연료 부족하면 짐 버리듯/적자 계열사 과감히 정리하시길 바래요”기아그룹에는 하루 1백50여통의 전화와 팩스, 격려편지가 쇄도하고 있다. 30년간 미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근무하면서 이 은행의 몰락을 지켜본 김근식씨(67·서울)는 지난 17일자 본지의 「김선홍 기아그룹회장 심야밀착인터뷰」기사를 보고 김회장에게 공개편지를 보낸 뒤 같은 편지를 본지기자에게 보내왔다. 김씨는 1930년 서울에서 출생, 경기고고려대를 졸업하고 59년부터 86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서 근무했다. 다음은 그가 김회장에게 보낸 편지다.<편집자주>
김선홍 회장 귀하.
희망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십시요. 그러나 기아사태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점이 있어 이 편지를 올립니다. 항공기가 비행할 때 연료가 모자라면 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버려야 합니다. 항공기는 가벼워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기아가 거느리는 28개 계열사중 적자를 기록한 회사는 버리십시요. 주력업체인 기아자동차만 살리십시요. 나중에 버린 업체들도 선택적으로 회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아는 훌륭한 회사고 회장도 훌륭합니다. 근로자들도 다시는 말썽을 부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다시 일어서십시요.
기아는 생산(기술)과 판매면에서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자금동원(금융)면에서는 부족했다고 봅니다. 이 세가지 요소를 적절히 배합해야 했음에도 기아는 자금운용에는 실패했습니다.
기아의 실수는 부동산에 있었습니다. 부동산을 주담보로 은행에서 자금을 썼고 다른 기업들처럼 확장했습니다. 우리나라 부동산 가격은 가치에 비해 너무 높습니다. 현재 시세의 절반가격이 적정가격이라 생각합니다.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이 92년 대통령선거 당시 『아파트값을 절반으로 내리겠다』고 한말을 귀담아 들어볼 일입니다. 부동산가격이 실제가치보다 높게 책정돼 있다 보니 불황으로 기업이 어려움에 봉착하면 부동산거품은 꺼지고 해당기업은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특히 기아처럼 금융업이 취약해 자체에서 자금을 조달하지 못할 때 더욱 그러합니다. 증권사나 보험, 은행 등을 소유한 회사는 용케도 살아나갑니다.
기아만 실수한 게 아닙니다. 국내은행들도 국내기업, 특히 기아의 부실화에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국내은행들은 국내부동산의 이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대기업이 부동산투기를 한다고 해도 자금을 대출해줍니다. 서울시민들의 절반이 집없이 살고 있는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저는 30년(59년∼86년) 가까이 미국 캘리포니아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에 근무하면서 이 회사의 흥망을 지켜본 사람입니다. BOA는 1904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뱅크 오브 이탈리」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 1906년 캘리포니아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실의에 빠진 시민들을 위해 은행문을 활짝 열면서 세를 확장해왔습니다. 집을 고치는 사람, 사업자금이 필요한 사람 등 돈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담보없이 은행에서 돈을 대출해 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경제가 안정됐을 때 시민들은 무담보로 대출해 간 돈을 95% 돌려주고 BOA만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BOA는 민간은행으로서는 자산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은행이 됐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화려한 명성을 떨치던 BOA도 70∼80년대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고 오늘날 그 명성을 잃었습니다. BOA가 실패한 원인을 30년간 근무하며 흥망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최고경영진의 오판이었습니다. 중남미에 정부담보로 지원한 자금이 남미경제의 부실화와 정치혼란으로 정부담보가 부실해지자 BOA의 부실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중남미의 혼란한 정국을 경영진이 제대로 읽지 못해 정권이 바뀌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BOA가 부실정부 담보가 원인이 돼 실패했듯 기아도 국내부동산구조와 금융구조를 제대로 파악못해 실패했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김회장은 재기할 수 있습니다. 지난 17일자 서울경제신문 정승량 기자의 글을 읽고 기아를 사랑하는 사람의 하나로 이 편지를 올립니다. 건승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