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휘청대는데…'마지막 보루' 내수 무너지면 미래장담 못해
투자-고용-가계소득 선순환 고리도 끊겨
'돈쓰는 분위기' 조성 등 발상전환 나서야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사실상 수출을 통한 성장전략을 구사했다. 지난 20여년 동안 수출로 먹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소비와 투자 등 내수가 정점을 보인 때는 카드사태와 외환위기가 발발했던 2000년 전후 무렵이었다. 만성적 내수부진에도 금융위기를 제외하면 3% 이상 성장에 무리가 없었을 만큼 우리 경제의 중심에는 수출이 자리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수출이 글로벌 경기부진 등 대외변수로 뿌리까지 휘청이면서 더는 수출에 기대기 어려운 형편이다. 정부가 22조원대 추가경정예산 편성에 이어 최근 개별소비세 30% 인하를 골자로 한 소비 활성화 대책까지 내놓은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그럼에도 내수는 기대만큼 올라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3% 성장률 사수가 버겁다는 진단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 내수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지만 각종 대책이 효험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저성장과 급속한 고령화 등 구조적인 요인에 주목하고 있다. 가계는 쓰고 싶어도 쓸 돈이 없고 기업은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투자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계는 1,100조원이 넘는 가계부채에다 사회보험 등 비소비지출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전월세 가격 등 주거비 급등과 교육비·의료비 증가 등도 소비 여력을 갉아먹고 있다. 보유자산은 적은데 안정적인 노후를 보내려면 적게 오래 쓰는 방향으로 소비를 리스케줄링하는 수밖에 없다.
기업 사정도 갑갑하다. 그간 우리 경제를 이끌었던 조선·철강 등 중후장대 산업의 경기는 완전히 꺾였고 이를 대체할 신산업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방향을 잡지 못하다 보니 여력이 되는 기업도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는 실정이다. 고용도 줄어들 수밖에 없어 가계에 악영향이 불가피하다. 수출과 내수, 양대 성장엔진이 모두 빛을 잃어감에 따라 한국 경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이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2%대로 하향 조정한 가운데 현대경제연구원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발 외환위기까지 발생할 경우 내년 성장률이 1%대로 추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내수 부진에 대한 우려가 과거보다 큰 것은 중국발 쇼크 등으로 수출이 단기에 회복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수가 한국 경제를 지탱할 사실상 마지막 보루인데 정부의 재정지출 여력도 크지 않은 상황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내수가 무너지면 한국 경제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정부도 이런 심각성 때문에 사실상 쓸 수 있는 카드는 다 꺼내놓고 있다. 최근에는 최 경제부총리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추진 중인 확장적 거시정책의 효과를 분석해보고 추가 부양정책이 필요한지 판단하겠다"는 말까지 꺼냈다.
내수 진작에 전력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경제가 저성장·고령화의 급속 진전 등으로 소비를 하기 힘든 구조로 점점 변모하고 있다는 데 있다. 소득은 정체되고 가계부채로 원리금 상환 부담은 높은 상황인데 노후·주거·일자리 불안은 극심해 소비를 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미 소비가 미덕인 사회로 바뀌고 있어 지갑을 열게 하려면 이전과는 다른 발상으로 정치한 해법 모색이 절실하다.
당장 소비 여건이 녹록한 세대가 없다시피 하다. 한마디로 소비를 주도할 핵심 계층이 안 보인다. 정구현 KAIST 교수는 "사회에 갓 진출한 청년층은 일자리 미스매치 문제로, 중장년층은 주거난, 아이들 교육비에다 자신들의 노후준비로 지갑을 열기 어렵다"며 "노년층도 전반적인 생활고 속에 형편이 나은 층은 저금리에 따른 연금자산 축소 등으로 소비 여력이 더 줄었다"고 말했다.
내수 소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인 평균소비성향(소득에 대한 소비의 비율)은 2010년 77.3%에서 올해 2·4분기 71.6%까지 떨어지는 등 추세적인 하락세가 뚜렷하다.
가계 수입의 원천이 되는 기업 쪽도 비빌 언덕이 별로 없다. 외부 감사 대상 기업(2만5,452개사) 중 3년 연속 번 돈으로 빌린 돈의 이자도 못 갚는 한계기업의 수는 지난해 말 기준 15.2%(3,295개사)에 달한다. 100개사 가운데 15개사 정도가 겨우 목숨만 연명하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 금리 인상 등의 외부 충격이 가시화하면 기업 구조조정 수요가 급증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일자리를 잃은 사람도 쏟아져나올 가능성이 크다. 금융당국 고위관계자는 "올해 말이 되면 한계기업으로 밀리는 대기업도 나올 것"이라며 "소비 저항감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나마 투자 여력이 되는 기업들은 불안한 미래에 투자를 늘리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의 경기전망을 보여주는 기업경기실사지수 실적치는 2014년 1·4분기 81에서 올해 2·4분기 66까지 떨어졌다. 지수가 100을 밑돌면 경기가 나빠질 것으로 예상하는 기업들이 많다는 의미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산업 사이클에 큰 변화가 나타나면서 국내 기업들이 불확실성으로 갈피를 못 잡고 있다"며 "투자가 줄다 보니 고용도 급감해 소비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 여건은 이처럼 꼬여 있지만 정부나 정치권은 희생양을 세우는 데 급급한 분위기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관료는 "내수를 살리려면 돈을 쓰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며 "이런저런 눈치를 보면서 골프 등을 금기시하는 등 경직된 사고방식 탓에 문제 해결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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