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드 루지치카(1939), 블라디미르 프렐로그(1975), 쿠르트 뷔트리히(2002). 이들은 스위스 출신 노벨화학상 수상자들이다. 스위스는 역대 노벨상 수상자를 29명이나 배출한 국가다. 미국·영국·독일·프랑스·스웨덴에 이어 여섯 번째며 총인구 대비 노벨상 수상자로는 세계 최고다. 그런데 대학 진학률은 40%에 미칠까 말까다.
기업 동참해 숙련도 높은 인재 육성
우리나라(70.7%)에 비하면 턱없이 낮다. 학문에 대한 열의와 훌륭한 연구 성과는 아무 상관없는 걸까. 높은 기술수준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고등교육 진학률은 낮은 이 현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스위스인들이 이에 대한 대답으로 꼽는 것은 직업교육제도(VET·Vocational Education and Training System)다. 스위스에서는 직업고등학교에 입학하면 기업체 근무를 병행하며 공부할 수 있다. 한국에도 기술을 가르쳐주는 마이스터고가 있지만 스위스의 직업학교는 한국보다 훨씬 더 기업 중심적이다.
학생들은 일주일에 이틀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사흘은 아예 기업으로 가서 일을 배운다. 단순한 기술교육이 아니라 집중적인 현장실습이다. 일정 보수도 받기 때문에 경제적 자립이 가능해진다. VET 견습을 끝낸 학생 중 약 70%는 동일한 회사로 취업한다고 한다.
사고가 유연한 청소년기부터 직업훈련을 받으면 단기간 내에 숙련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들도 VET 참여를 반긴다. 높은 숙련도가 필요한 기계·엔지니어링·금속 분야의 중소·중견기업들은 VET로 유능한 기술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직업학교와 밀접하게 협업한다. 학교와 기업의 경계가 따로 없는 셈인데 오히려 기업이 인력양성에 책임감을 갖고 열과 성을 다하는 게 인상적이다.
정밀기계, 화학·바이오 분야에서 기술강국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스위스의 경쟁력은 이처럼 될성부른 기술인재들을 떡잎 때부터 철저하게 도제식으로 학습시켜 마이스터(장인)로 키워내는 직업교육 시스템에서 나온다. 최근 스위스 제약사 로슈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VET 견습생은 대학 졸업자와 비교해 받는 차별은 없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당황하는 듯했다. 대학에 가지 않아도 일찍부터 자신의 적성을 살리면 당당히 기술 전문인력으로 대우받는 사회적 환경이 정착돼 있는 걸 모르고 한 우문이 되고 말았다.
기술인 우대해야 일자리 문제도 해결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이 최근 스위스 엔지니어링협회(SWISSMEM)와 고용연계형 인력양성 사업에 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것은 '스펙 타파, 능력 중심 사회'로 가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스위스의 선진 직업교육 시스템을 벤치마킹해 국내 마이스터고 교육과정 개선에 기여할 계획이다. 학생들이 스위스 기업에서 일하도록 지원하기 때문에 일자리 창출도 유도하고 소질 있는 기술 인재들이 일찍 노동시장에 진입해 적합한 일자리를 찾게 해줌으로써 일자리 미스매치 해소에도 새로운 시각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고학력자 과잉으로 인한 사회적 낭비가 심한 우리나라야말로 하루빨리 기업과 시장이 주도하는 직업교육을 시작해야 한다. 청년 실업률이 8%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청소년 직업교육의 혁신과 내실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상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