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비운의 정치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98)이 1882년 자신과 구식 군대가 손잡은 임오군란이 진압되면서 청나라로 잡혀가 유폐 생활을 하면서 한글로 쓴 편지다.
이 편지는 봉투에 ‘뎐(殿ㆍ대궐 전) 마누라 젼(前ㆍ앞 전)’이라고 적혀 있어 흥선대원군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로 알려져왔다. 하지만 이종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최근 원내 어문생활사연구소가 주최한 ‘조선시대 한글편지 공개 강독회’에서 마누라는 지체 높은 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를 때 사용된 말이며 이 편지에서는 중전, 즉 며느리인 명성황후(1851~95)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순조 임금의 딸 덕온공주의 손녀인 윤백영 여사의 글에도 ‘뎐 마누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중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며 흥선대원군이 쓴 편지의 사연을 보더라도 마누라는 그의 부인이 될 수 없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흥선대원군이 정치적 앙숙인 명성황후에게 왜 이처럼 꼬리를 내리고 바짝 엎드렸을까?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과 손잡은 구식군대의 군란(軍亂)으로 목숨을 잃을뻔 했으며,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으로부터 사태 수습을 위임받은 뒤 명성황후가 사망했다고 공포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명성황후측이 끌어들인 청나라 군대에 끌려가 3년간 유폐 생활을 하는 신세가 됐고 이 편지는 그 때 쓴 것이다. 이 박사는 “흥선대원군의 편지는 필요에 의한 것이지 정서적 친밀함이 담기진 않았다. 당시 상황이 무척 다급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흥선대원군은 며느리에게 후사(後嗣ㆍ대를 이을 자식)를 부탁하는 내용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