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77> ‘썸’타는 시대


소비자 심리 연구 전문가인 서울대 김난도 교수는 2015년의 중요한 트렌드 중 하나로 ‘썸’을 이야기했습니다. 젊은이들 말로 남녀 사이에 명확한 관계 정의 없이 감정만 주고받으며 애매함을 유지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치환시키면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적당히 간보기를 하면서 관계를 모호한 상태에 두는 겁니다. 일단 선택을 하면 그 안에 고착화되는 효과가 있으니까, 사전에 유연성을 갖기 위한 포석인 셈이죠.

‘썸’을 탄다는 건 그만큼 긴장감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늘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새로운 즐거움이 발현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남녀가수가 ‘썸’이라는 노래를 하기도 했었죠. 서로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모호한 상태에 놓여 있는 사이지만 충분히 재미와 존재의 이유를 느낄 수 있는 사이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처럼 모호하고 경계가 희미한 관계는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일례로 남북관계가 그렇습니다. 서로 협력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늘 공감하고 있지만, 앞으로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비난과 공격의 언사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상대방과의 관계 유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충분히 조심하기’ 또는 ‘가끔 치고 나가기’입니다. 완전히 서로 내부화된 순간, 마치 권태를 느끼는 부부처럼 누군가는 ‘막하는’ 사이가 될 것이라는 점을 예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인간은 쉽게 얻은 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자기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을 열망하고, 정복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런 심리는 국가나 공동체 간의 관계에도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사실상 수많은 갈등과 협력의 그림자가 한 관계 속에서 나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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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트렌드에서도 썸이 갖는 의미가 발견되곤 합니다. 비고객과 고객 사이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기술이 개발되고 있는 것이죠.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팝업 스토어(Pop-up store), 간접 광고 등을 통해 표현된 상품 이미지 등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을 구매할 의사는 없지만, 관심 정도는 기울이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오히려 ‘사주는’ 사람들보다 더 잘 관리해야 할 사람들이 상품과 썸을 타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당장 가격을 지불하지는 않지만, 평판은 끼리끼리 공유하는 이들이기 때문이죠. 기업은 수많은 썸타는 사람들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데이터를 들여다보고, 캠페인을 벌이며, 광고를 기획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과 온전해 질 날을 기대하며 사랑 노래를 부르죠. 마치 남녀 가수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내년 총선과 그 다음에 있을 대선에서도 ‘썸타기’가 중요한 트렌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누군가는 논공행상을 빌미로 자신의 주군을 보다 유연하게 택하려 할 것이고, 상대방에 대한 지지를 선명하게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한동안 미디어는 그들의 애매한 행보를 예측하며 대중의 관심을 키워 나가는 데 주목하겠죠.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애매한 관계를 지속하지 말 것. 잠깐은 필요한 긴장일지 몰라도 초조한 상태를 오래 견디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 이상 아무도 설레지 않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면, 썸타는 모드에도 과감한 변화가 필요한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때를 위해 어느 방향으로 갈지를 충분히 고민하시길 바랍니다.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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