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23일] 최용신


‘나의 몸과 마음을 남김 없이 태워 이 마을을 밝히도록 해주소서.’ 농촌 계몽에 나선 최용신이 1931년 샘골(안산시 본오동)에 도착해 올린 기도다. 신학교에 다니다 농촌 운동에 뛰어든 지 2년여, 경험도 쌓이고 자신감도 있었지만 주민들은 반응은 여느 곳과 똑 같았다. ‘곰보 신여성’에 대한 편견도 없지 않았다. 이를 악 다문 최용신은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강습소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아낙네들과 들에 나가 농사도 졌다. 밤에는 한글과 산수, 재봉과 수예를 교육하는 야학을 운영했다. 자신은 굶주려도 학생들은 먹였다. 사람들의 호기심은 2년의 시간이 흐른 뒤 적극적인 참여로 바뀌었다. 샘골 사람들은 스스로 힘으로 학교를 짓고 공동생산도 늘렸다. 주민들의 단결을 일제가 반길 리 만무. 110명이 다니던 강습소의 학생 수를 60명으로 묶어버렸다. 최용신은 50여명의 학생들을 버리지 않고 따로 야학을 차려 가르쳤다. 재충전을 위해 일본 고베여자신학교에 들어간 그는 6개월 만에 되돌아왔다. 누적된 영양 실조와 중노동의 후유증이 각기병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최용신은 고향 원산에서 요양할 생각이었지만 샘골 주민들이 ‘누워만 있어도 좋다’며 모셔갔다. 몸이 다소 나아지자 활동을 개시했지만 이번에는 창자가 뒤틀렸다. 죽음 앞에서도 그는 농촌을 걱정했다.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강습소는 영원히 경영하여 주시오…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는 어떡하나…’라는 유언을 남기고 1935년 1월23일 눈을 감았다. ‘샘골의 성자’ 최용신은 26세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심훈의 소설 ‘상록수’로 다시 태어났다. 소설의 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이 최용신이다. 사람들이 마음 속에서 영생을 얻은 최용신은 푸르디 푸르게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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