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9월16일] 명량대첩 권홍우 1597년 9월17일 전남 울둘목. 일본의 정예함선 133척이 바다를 덮었다. 예비함대 70척도 뒤를 따랐다. 조선 수군의 세력은 불과 13척. 누가 봐도 결과가 뻔한 싸움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100척 이상의 일본 배를 침몰시킨 조선의 압승. 한산대첩과 더불어 사상 최고의 해전으로 꼽히는 명량대첩의 개요다. 명량해전은 정유재란의 흐름을 뒤바꿨다. 10만명의 병력이 배를 타고 서해를 북상해 한양을 친다는 일본의 수륙병진책이 수포로 돌아갔다. 한양을 200여리 앞둔 직산과 보은까지 올라왔던 일본군이 남쪽으로 총퇴각한 것도 명량해전 패전 직후다. 조선 수군의 승전요인은 명장 이순신의 존재. 빠르고 급변하는 울둘목의 해류를 이용할 줄 아는 지략과 불굴의 의지, 경영자적 마인드가 승리를 낳았다. 경영인으로서 이순신 장군의 면모는 곳곳에서 빛난다. 직할부대만 통상 1만7,000여명. 피난민까지 수만명을 먹여 살리며 전투에 임했다. 충무공이 영국의 넬슨이나 일본의 도고 등 명제독들보다 몇 단계 위라는 점도 직접 함선을 건조하고 군량미를 조달하며 싸웠기 때문이다. 명량해전으로부터 10개월 뒤에 주력선인 판옥선은 85척으로 불어난다. 생산에서도 뛰어난 실적을 거뒀다는 증좌다. 당시 함선 건조비용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요즘 복원되는 거북선 건조비가 척당 22억~40억원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적지않은 '규모의 경제'를 운영했음을 엿볼 수 있다. 부상병과 피난민을 동원해 경작했다는 둔전(屯田)을 일구고 선박통행세를 거둬 군비에 충당했다. 탁월한 재정운영이 통산 23전23승이라는 불멸의 전적을 낳은 셈이다. 명량대첩 409주년. 경제가 어렵고 나라가 시끄럽다. 충무공 정신이 필요한 때다. '애국과 헌신, 치밀한 경영.' 입력시간 : 2006/09/15 1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