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사회생활을 위한 걱정거리 때문에 두루 신경이 쓰이고 머리가 무거워지던 대학시절도 아니고, 아직도 애송이를 못벗어난 중학생 시절도 아닌 고등학교 시절은 정말 추억 속에서 황금기가 아닌가 싶다. 곳곳에서 초ㆍ중ㆍ고교, 대학교 동창회가 많이 열리지만 그중 고교 동창회처럼 잘 모이고 반가운 모임은 없는 것 같다.
벌써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40년이 훌쩍 넘어 귀밑머리는 말할 것도 없고 염색에 의지하지 않고는 온 머리가 눈밭인데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겠지만 나의 모교는 수십년 인생의 고락을 함께하며 미운정 고운정 다 들며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조강지처처럼 새로운 소중함으로 다가온다.
‘잘살자’라는 매우 간단명료한 이 세 글자가 바로 모교의 교훈이다. ‘잘살자’는 되뇌어볼수록 현실적인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잘살자’라는 교훈은 물질적 풍요만이 아닌 올바르고, 부지런하고, 튼튼하게 잘 살아보자를 뜻한다. 처음 우리가 모교에 입학해 이 교훈을 대했을 때는 ‘돼지의 만족보다 소크라테스의 불만족을 택하리라’를 운운하며 어쭙잖게 명상가(?)를 자처하던 고교 시절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별로 만족스런 교훈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잘살자? 잘살기 싫은 사람이 어디 있나? 잘살자? 너무 단순한 것 같아….’ 이렇게 뇌까리며 모교의 교훈에 대해 마땅찮은 마음을 지녔던 때가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모교를 떠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모교의 교훈은 재학 중이던 때보다 더 생생하게 내 삶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잘살자! 암, 잘살아야지, 잘살고 말고…. 사회가, 국가가, 세계가 온통 사는 문제, 경제 문제, 잘살고 못사는 문제로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 혹은 개발도상국이냐의 판가름이 나는 현실이 아닌가. 모교의 교훈이 경제 문제로만의 잘사는 이야기가 아닌 포괄적 의미의 잘 살기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지만 오늘의 현실이 경제 마인드가 최우선시되는 시대이니만큼 절실한 교훈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아무리 사회가 변화하고 풍요로워진 것 같아도 가장 중요한 이슈는 경제로, 올해 말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 역시 국민을 잘 살도록 하겠다고 하는 경제 마인드를 놓치지 않는 것 같다. 후보 중에는 북한의 GNP 문제를 거론하면서 결코 우리만 잘산다고 잘사는 것이 아닌 한민족으로의 미래까지를 내다본 정책을 제시한 것을 유심히 봤다.
개교 70년, 7만명의 동문을 대표하는 총동창회장직을 맡게 됐다. 몇 가지 다른 일도 아직 손놓지 못하고 있지만 총동창회장직의 막중함을 느낀다. 동문이 7만여명에 이르다 보니 우선 각계각층에서 대단히 성공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전분야에 고루 분포된 동문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각계각처에서 잠잠히 건실하게 잘사는 동문들을 두루 만나보게 됐다. 티없이 밝게 정말 모두들 잘 살고 있었다. 필자는 처음으로 모교의 교훈을 매스미디어를 통해 자랑하고 싶은 자부심을 느꼈다. 모교의 교훈도 학창시절로 끝난 게 아니라 졸업 후 수십년이 넘도록 우리 졸업생들의 삶을 이끌어온 배후의 큰힘이었던 것이다.
설립자였던 교장선생님은 일찍이 독실한 기독교 장로님이셨다. 아마도 그분은 우리들의 현세적 삶만이 아닌 내세적 삶까지를 생각하고 교훈을 정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경제 문제가 국가 최우선의 과제요 정치쟁점화하고 있는 이 시대에 정말 잘 살아야겠다고 재삼 다짐해본다. 올바르게, 부지런하게, 튼튼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