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간부 한 사람이 새해 덕담을 건넸다. "원장님, 올해는 5통하십시오." 5통이라니, 무슨 통? 설명인즉 운수대통·만사형통·의사소통·요절복통을 하라는 것인데, 그럼 마지막 1통은? 이 친구 한 번 알아맞혀보라며 잠시 뜸을 들이더니 "전화 한 통"이라 한다. 맞다 싶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주위 사람들에게 전화 한 통 안 하고 산 지가 벌써 얼마인가. 살면서 신세 진 사람도 많은데 해가 바뀔 때 안부 전화 한 번 못했으니 부끄럽다.
누구보다도 총무들에게 미안하다. 총무라니. 왜 있지 않은가. 내가 소속돼 있는 여러 모임, 예컨대 학교 동기 모임, 산악회를 비롯한 각종 동호인 모임, 매월 첫째 수요일 점심을 함께 먹는 모임, ○○식당에서 자주 만난다고 해서 ○○회 등등 수많은 모임을 이끌어가는 총무들 말이다. 한국 성인남녀라면 누구나 이런 모임을 갖고 있고 한 달이면 적어도 3∼4회 총무들에게 "야 얼굴 좀 보여줘라, 너 이번에도 빠지면 죽어"와 같은 반협박성 전화(문자)를 받는다.
총무들 전화는 대체로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워낙 허물없는 사이인데다가 왜 이때 전화를 했는지 대충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깔아뭉갠다. 잘나가는 친구들일수록 더 그렇다. 하지만 총무 입장이 한 번 돼보라. 오든 안 오든 전화는 해줘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일정도 잡고 예약도 하지. 어디 그뿐인가. 모임 후에는 모든 회원에게 다시 결과 보고도 해야 한다. 회원들 동정(動靜)과 애경사를 알려주는 일도 총무 몫이다.
모임 날짜 정하기는 왜 또 그리 어려운지. 가능한 많은 회원이 나올 수 있는 날을 잡아야 하는데 저마다 선약이 있어 스마트폰 쥐고 한나절은 실랑이를 해야 한다. 조의금이나 축의금을 대신 전달하는 일은 또 어떻고. 이런 일들이 보통 귀찮고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누구든 여간해서는 총무를 안 맡으려고 한다.
젊었을 때는 몰랐지만 나이 들수록 총무란 참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다. 총무가 아니면 누가 나에게 친구들의 경조사를 일일이 알려주며 등산이라도 같이 가자고 전화를 해줄 것인가.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맨 먼저 연락하게 되는 사람도 총무다. 총무는 내가 바깥세상과 맺고 있는 많은 관계의 출발점이다.
우리를 '사회적 동물'이게 하는 여러 메커니즘이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단연 총무다. 자신의 귀한 시간을 희생해 한 모임을 굴러가게 하고 그런 모임들이 모여 더 다양하고 활기찬 공동체를 일궈낸다. 총무는 이를 위해 스스로 을(乙)이 되기를 자처한 사람이다. 오지랖 넓은 사람, 어장(漁場) 관리자쯤으로 볼 것은 아니다. '모교에 책 보내기 운동' 같은 좋은 일도 대개는 총무 머리에서 나온다. 좋은 총무가 좋은 모임을 만들고 좋은 모임이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 새해에는 총무에게 자주 전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