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1월 22일] <1601> 엘리제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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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월22일, 파리 엘리제궁.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아데나워 서독 총리가 상호협조조약을 맺었다. 통상 엘리제조약으로 불리는 이 조약의 골자는 세 가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외교ㆍ국방ㆍ교육ㆍ문화 등 전분야의 협력을 강화하며 국가 원수 및 각료들이 정기회합을 갖는 데 합의했다. 엘리제조약은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두 나라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2차 세계대전까지 250여년 동안 대규모 전쟁만 네 차례나 치렀던 철천지원수 아니었던가. 미국과 영국의 충격이 특히 컸다. 유럽의 독자적인 세력형성을 꺼렸기 때문이다. 두 나라는 어떻게 악수를 나눴을까. 단기적으로는 앵글로색슨이 좌우하는 국제질서에 대한 드골 대통령의 반감이 크게 작용했다. 미국과 영국이 핵미사일 도입에서 전후 식민지 처리까지 프랑스를 배제하는 데 화가 치민 드골이 견제수단으로 고른 게 독일 카드다. 서독으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전범국가의 입장에서 국제무대에 복귀할 기회였으니까. 보다 근원적으로는 1860년 영불통상조약(콥든-슈발리에 협정) 이후 영국에 경제가 종속됐다는 프랑스의 피해의식이 서독과의 제휴로 이어졌다. 유럽연합(EU) 탄생(2003년)의 출발점격인 엘리제 조약은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1989년에는 양국의 군대를 섞은 독불여단이 창설되고 2006년에는 청소년들의 건의로 공통 역사교과서가 만들어졌다. 두 나라 정상은 해마다 두 차례 이상, 주요 장관들은 3개월에 한번씩 정례회의를 갖는다. 프랑스와 독일은 물론 이탈리아 북부에 존재했던 프랑크왕국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두 나라의 협력은 양보와 가해자의 철저한 자기반성에서 비롯됐다. 우리도 이웃과 친하고 싶지만 요원하다. 교과서까지 왜곡하며 침략과 수탈을 미화하는 가해자가 변하지 않는 한.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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