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극이 펼쳐지는 공간적 배경이자 극의 주제를 관객에게 암시하는 도구다. 연출가들은 무대 세트를 적절히 배치해 배우들에게 연기 구역을 정해 주고 각 장면에 적합한 시각적 환경을 제공해 작품의 이해를 돕는다. 그런데 최근 무대를 채우기보다 비우는 '역발상'으로 극적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시도가 잇따르고 있다. '여백의 미'를 통해 관객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는 한편 무대의 시ㆍ공간적 제약을 뛰어넘겠다는 시도다.
5월 1일까지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주인이 오셨다'는 가림막이나 벽이없는 직사각형 모양의 평면적인 공간에서 극이 전개되고 연기가 끝난 배우들은 무대 바로 아래 마련된 의자로 자리를 옮겨 관객과 같이 앉아서 공연을 본다. '주인이 오셨다'는 주종의 권력 관계가 부른 참혹한 삶의 현장을 여과 없이 다룬다. 탄자니아 출신의 이방인 순이를 통해 다문화사회의 이면을, 혼혈아인 자루를 통해 학교라는 집단의 뒤틀린 권력관계를, 금옥을 통해 남녀의 주종관계를 보여주며 권력의 모순을 꼬집는다. 무대는 별도 장치 없이 금옥의 식당에서 자루가 살인을 저지르는 친구의 집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학교로, 교도소 독방으로 바뀐다.
5월 1일까지 공연되는 음악극 '더 코러스:오이디푸스'는 1,000석 대극장인 LG아트센터 객석 전체를 비우고 관객들을 무대 위에 별도로 만든 300석 규모의 객석으로 끌어올렸다. 천장에는 적갈색 문과 수십 개의 백열등이 걸려 있고 무대 주변에는 문ㆍ난로ㆍ욕조ㆍ피아노 4대가 놓여 있다. 무대 장치만 특이한 게 아니다. 배우 10여명이 합창이나 독창으로 노래하거나 까마귀 울음소리 같은 음향으로 코러스 효과를 낸다. 서재형 연출은 "고전의 함축적인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무대를 비우는 대신 다양한 이미지를 활용했다"며 "난로는 테베가 더운 나라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동시에 권력이 응축된 왕좌를 상징하고 있으며 무대 천장과 바닥에 마주 보도록 설치한 지름 8m의 원판은 운명의 수레바퀴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의정부예술의전당 대극장(5월 20~22일)과 LG아트센터 대극장(6월 14~19일)에 잇따라 오르는 신개념 판소리 '억척가'도 무대 위에 별도로 만든 300~400석 규모의 객석과 호흡한다. 차세대 국악인으로 주목받는 이자람은 극작ㆍ작창ㆍ연기ㆍ음악감독 등 1인 4역을 맡아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을 우리 시대 억척스러운 엄마의 모습으로 탈바꿈시킨다. 소리꾼(이자람)과 소수의 악사들이 극을 이끌어가는 무대 위에는 최소한의 장치만 마련해 판소리 특유의 '비움의 미학'을 실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