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경이 만난사람] 김필립 美컬럼비아대학 교수

"기초과학은 문화… '과학자만의 영역' 인식 벗고 저변확대를"



한국은 응용과학에 너무 치중
당장 돈 안 된다고 생각 말고
기초과학에도 동등한 지원을 이공계 기피현상 해소 위해선
국가차원 적극적 지원책 필요
"지식인들이 셰익스피어를 잘 모르는 것은 부끄러워하면서 열역학 제2법칙을 모르는 것은 왜 부끄럽지 않을까요?" 뜬금없는 질문이다. 열역학 제2법칙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노벨물리학상을 아깝게 놓쳤지만 우리 기초과학의 가능성과 미래를 보여준 김필립 미국 컬럼비아대 응용물리학과 교수. 그가 말하는 기초과학은 '문화'다. 김 교수는 "문학이나 음악ㆍ미술 작품이 당장 돈을 만들지 못한다고 무시하지 않는다"며 "하지만 한국의 과학 현실은 일정 기간 안에 응용을 성공해 상업화하지 못한다면 접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기초과학도 시대를 따라 계속 쌓여 사회를 변화ㆍ발전시키는 하나의 문화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해가 되는 얘기다. 김 교수는 "사실 열역학 제2법칙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하지만 기초과학의 저변 확대가 이뤄지지 않고 기초과학 발전을 논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열역학 제2법칙은 에너지를 절대 만들 수도 없애버릴 수도 없다는 1법칙인 에너지 보존법칙에 이어 에너지가 자유로이 형태를 바꿀 수 있지만 그때마다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현대과학의 기본법칙 중 하나다. 김 교수는 자신을 노벨물리학상 후보에 오르게 했던 그래핀(graphene) 연구도 한국에서는 기초보다 응용에 너무 치우쳐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래핀 응용연구에서는 한국이 선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특히 그래핀의 대면적 성장이나 그것을 이용한 응용연구와 산업과의 연계연구 등에서 앞서나가 외국 학회 등에서 한국 연구자들을 연사로 초청하는 경우가 많다"며 "하지만 그래핀 연구가 너무 응용 쪽으로 치우쳐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기초연구에도 동등한 지원이 돼야지 응용만 지원해서는 전체 발전이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가 노벨상 수상에서 제외(?)된 것도 그래핀을 세상에서 처음 발견한 과학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노벨과학상은 중요한 평가요소로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 (SCI) 논문 건수와 피인용도를 중요하게 본다. 노벨물리학상 수상 사례를 보면 새로운 현상이나 실험기법 발견이 69회, 이론ㆍ실험적 검증은 32회로 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쉽게 말해 세상에 없던 새로운 성과를 내고 이것을 수십년에 걸쳐 산업발전을 통해 사회에 기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최근 도쿄 출장을 다녀왔다는 김 교수. 미국 얘기보다 일본 얘기를 더 많이 한다. 100년 역사의 이화학연구소(리켄)의 세미나에 참석한 김 교수는 리켄의 규모와 역사에 놀랐고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노력이 부러웠다고 전했다. 그는 "정부 주도로 이뤄지는 연구는 연구비는 물론 모든 면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지원을 하고 있다"며 "특히 당장 실용화 또는 상업화가 되지 않는(통상 5~10년, 장담은 못한다고 한다) 연구에도 지원이 계속되도록 강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실제 이화학연구소에 상당 부분 기여하고 있는 일본의 정보통신업체 NTT의 경우 이익의 일정액을 기초과학에 투자하도록 법으로 강제하고 있다. 김 교수의 말처럼 일본은 기초과학에 대한 장기적인 지원과 함께 사회적 풍토가 유지된다. 지난해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네기시 에이이치 미 퍼듀대 교수, 스즈키 아키라 일본 홋카이도대 교수를 배출하면서 지금까지 노벨상 수상자는 총 18명. 노벨화학상 수상자만도 7명이다. 일본 과학자들의 노벨상 수상에 기여한 논문은 주로 30대에 발표됐다. 일본 문부과학성 과학기술백서(2007년)를 보면 1986년에서 2006년까지 노벨 화학ㆍ물리ㆍ생리의학상 수상자 137명 중 48%에 해당하는 66명이 30대의 연구 결과로 상을 받았다. 김 교수는 "일본의 포스닥(박사 후 과정)에 대한 정책 및 자금지원 확대 방안과 '신테뉴어 트랙제도' 는 눈여겨볼 만한 장기 지원제도"라고 소개했다 '신(新) 테뉴어 트랙제도'는 대학에 채용되는 신진 연구자를 국가가 결정해 3~5년 정도 연구비와 급여를 지원, 해당 대학에서 독립적인 연구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뒤 이후 대학이 독자적으로 최종 정년직 채용을 결정하도록 한다. 김 교수는 "이리저리 눈치 볼 것 없이 능력 있는 신진 연구자의 초기 일자리와 연구비를 정부가 일정 기간 안정적으로 지원해줌으로써 대학과 연구진 모두가 윈윈하고 있는 점은 부러운 여건"이라고 말했다. 조심스럽게 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워낙 많이 듣는 질문인지 김 교수는 웃으며 "돌아오고 안 돌아오느냐의 문제는 이제 논의의 단계를 넘어선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는 "기초과학뿐만 아니라 응용과학 모두 이제 공동연구가 기본"이라며 "자신의 연구에 맞게 공동연구를 잘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 곳에 있을 뿐이지 어디든 상관없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석사까지 마친 소위 국내파다. 박사와 포스닥 과정을 거친 후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냐 하는 고민 속에서 컬럼비아대에 '일자리'가 생겼고 한국보다 미국에 머무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기초과학이 약한(?) 한국보다는 글로벌 연구 네트워크를 갖춘 미국의 연구환경이 더 낫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도 덧붙였다. 김 교수는 "한국에 있었다고 그래핀의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라며 "연구 네트워크 측면에서 미국에 있는 것이 좀 더 낫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자기 분야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와 연구조건ㆍ과정 등을 검증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미국의 연구환경은 상당히 우수하다"며 "글로벌 연구 네트워크를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꼭 한국에 있는 과학자만이 한국인 과학자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과학을 문화라고 말하는 김 교수는 과학자들이 연구 초기단계부터 연구의 저변 확대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경우 국가과학재단(NSF) 등의 후원을 받는 연구프로젝트는 반드시 연구에 대한 교육과 홍보(PR)를 어떻게 할 것인지의 계획도 같이 내야 한다"며 "연구 결과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중요하지만 이 연구를 어떻게 일반인에게 이해시킬지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도 처음 NSF에 후원을 받는 프로젝트에 교육 부문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충 앞선 연구자들이 낸 것을 베끼거나 형식적으로 냈다. 하지만 연구지원 선정에서 당락을 결정할 정도로 이 부문이 강조될 뿐 아니라 스스로도 중요성을 느끼며 지금은 연구 본프로젝트 계획안보다 더 신경 쓴다. 자녀들에게 조언도 구한다고 한다. 김 교수는 "한국도 기초과학은 그들만의 영역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학생은 물론 일반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 프로그램에 더 신경 써야 한다"며 "과학이 산사에 머물기보다는 산 밑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한 것으로 화제를 돌리자마자 김 교수는 목소리를 높였다. 기초과학 지원이나 정책 부문에서는 한국이 분명 과거보다 나아지고 있지만 이공계 기피현상은 뚜렷한 답을 찾기 어렵다며 김 교수는 안타까워했다. 그는 "전국에 의대와 한의대가 다 차고 나서 서울대 이공대에 진학한다는 말을 듣고 정말 안타까웠다"며 "이공계를 졸업하고도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다면 당연히 기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공계 기피현상 해소를 위해 정부는 물론 교육 등 전 분야에서 해소책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딱 부러지는 답을 제시하지 못하지만 지금이라도 국가적인 이공계 지원정책과 과학에 대한 저변확대 등을 통해 과학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과 과학자 그들만의 영역이라는 인식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노벨물리학상 아깝게 놓친 세계 그래핀연구 양대산맥, 국내 물리학도들의 롤모델
■김필립 교수는 지난해 10월 이후 언론을 가장 많이 탄 과학자를 꼽으라면 당연히 김필립 미국 컬럼비아대 응용물리학과 교수다. 과학에 별 관심이 없는 일반인까지도 이름 정도는 들었을 법하다. 김 교수가 유명세를 탄 것은 노벨물리학상과 무관하지 않다. 2010년 노벨물리학상은 영국 맨체스터대의 안드레 가임 박사와 콘스탄틴 노보슬로프 박사에게 돌아갔다. 첨단 신소재인 그래핀(graphene)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과학잡지 네이처는 이번 노벨물리학상이 노벨위원회의 실수로 엉뚱한 사람에게 수여됐다며 김 교수가 지난 2005년 네이처를 통해 그래핀을 발표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보도가 나간 후 노벨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얼마나 컸던지 국내 과학계는 김 교수의 노벨상 수상 실패를 마치 상을 도둑맞은 것처럼 흥분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유명세가 무섭기는 하다"며 "아내가 이제는 인터뷰를 하지 말라고 할 정도"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가임 박사와 함께 그래핀 연구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학계에서는 이전부터 그래핀이 노벨상 대상이라면 김 교수가 수상하게 될 것이라고 평해왔다. 하지만 실수든 아니든 상의 번복은 불가능한 일. 김 교수는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한 분야에서 두 번 노벨상을 주지 않으니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석사를 마치고 고민 끝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때늦은 유학파다. 요즘 학부부터 해외로 가는 시절과는 다르다. 1999년 하버드대 응용물리학과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6년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로 임용된 후 세계 응용물리학계의 주목받는 학자 중 하나다. 김 교수는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학자인 동시에 국내 물리학도들이 롤모델로 삼고 싶은 선배이기도 하다. 천재라기보다는 노력하는 학자, 그리고 연구를 즐길 줄 아는 학자이기 때문이다. 물리학도들이 본받고 싶어한다는 말에 김 교수는 정말 맑게 웃었다. 그는 "나는 똑똑한 학생도 더구나 천재도 아니다"라며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많은 가운데 내가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고 롤모델이 된다는 것은 한국이 노벨상에 더 가까워진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학교가 있는 미국 뉴욕에서 김 교수는 부인과 고등학생인 딸ㆍ아들과 살고 있다. 구식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듣는 게 취미라는 김 교수. 성균관대, 삼성전자 종합기술원과 공동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약력 ▦1968년 서울 ▦서울대 물리학과, 석사 ▦미 하버드대 응용물리학과 박사 ▦미 컬럼비아대 교수 ▦미국 물리학회 응집물질물리 분과 석학회원 ▦2008년 호암상 과학상 수상
휘는 디스플레이·차세대 반도체 소재로 각광
■꿈의 신소재 그래핀 인류가 발견한 가장 얇고 튼튼한 물질
기술 응용^상용화에 한국 선도적 위치
김필립 교수를 노벨과학상 후보로 올렸다가 좌절되며 아쉬움을 남긴 그래핀(graphene)은 꿈의 신소재로 불린다. 그래핀은 연필심에 쓰이는 흑연(graphite)과 화학에서 탄소 이중 결합을 가진 분자를 뜻하는 접미사 'ene'을 결합해 만든 용어다. 구리보다 100배 이상 전기를 빠르게 전달하고 신축성이 좋아 구부리거나 휠 수 있다. 휘어지는 디스플레이와 차세대 반도체 소재로 각광받고 있다. 사실 그래핀의 존재는 이미 오래 전에 알려졌다. 이론적으로는 지난 1947년에 최초로 연구됐다. 하지만 고작 하나의 탄소층으로 형성된 그래핀을 얻는 일은 과학자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첨단 나노기술을 활용해 그래핀을 만들어보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지난해 노벨상 수상의 두 주인공이 나서기 전까지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래핀의 발견은 지난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안드레 가임 교수와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박사(둘은 사제지간이다)가 '재미의 과학(Fun Science)'을 추구하며 엉뚱한 실험에서 얻어낸 결과물이다. 신소재 개발의 도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색한 스카치테이프가 동원됐다. 흑연에 붙였다 떼어낸 스카치테이프를 10번에서 20번 정도 붙였다 뗐다를 반복해 원자층이 한 층밖에 안 되는 세상에서 제일 얇은 신소재 그래핀을 얻어냈다. 그래핀의 발견은 우리가 한발 뒤졌지만 기술응용과 상용화 부문에서 국내 대학과 기업들이 세계에서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그래핀은 한국이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주요 산업기반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에 혁신을 가져올 소재인 만큼 기술개발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래핀은 벌집 모양으로 연결된 나노물질로 탄소원자 한 층으로 구성돼 있다.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가장 얇고 튼튼한 물질이다. 잘 휘고 투명하며 전기전도성이 높아 응용할 분야는 무궁무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휘는 디스플레이와 고효율 태양전지, 실리콘을 대체할 초고속 반도체 등 미래 사회를 바꿀 만한 첨단기술을 가능하게 할 꿈의 소재로 각광받고 있다. 그래핀이 상용화되면 접는 디스플레이, 입는 컴퓨터는 상상에서 현실이 된다. 현재 그래핀 응용기술은 국내의 경우 성균관대와 삼성전자가 주도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성균관대는 지난해 대면적 합성 기술을 제시하고 올해 그래핀을 활용한 나노전력발전소자도 개발하는 등 기술 상용화에 한 발씩 다가서고 있다. 김 교수는 "물론 기초과학으로 그래핀을 발견했다고 이게 모두 상용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계에서 그래핀 상용화에 한국이 가장 선도적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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