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고전 인문학 강좌 '고인돌'이 바꾼 교실 풍경, "막연하던 자아, 묻고 답하니 감 잡히네요"

인문학 넘어 영화·경제사까지

31개 강좌·155회 강의로 이뤄진 '고인돌 2기' 교육 막내려

시민들에 인문학 문턱 낮추고 청소년들 지적인 시야 넓혀줘

방현희 작가가 지난 15일 서울 강남구 자곡동 세곡중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 ''고인돌'' 수업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백상경제연구원


"피비, 나는 넓은 호밀밭에서 어린아이들이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본단다.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어. 내가 하는 일이란 누구든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가서 잡아주는 거야.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지."

지난 15일 고전 인문학 강좌 '고인돌(고전 인문학이 돌아오다)'이 진행된 서울 강남구 자곡동 세곡중학교 시청각실. 한 여학생이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한 부분을 낭독한다. 처음에는 부끄러운 듯 읽어나갔지만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리고 주인공의 감정에 몰입한다. 모여 있는 30명의 학생들도 눈을 빛내며 집중한다. 통상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후에는 수업 분위기가 흐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날 고인돌 수업은 기존 교실 풍경과는 확연히 달랐다.

서울시교육청과 백상경제연구원이 공동으로 개최하고 롯데그룹이 후원하는 고인돌은 매번 주제에 따라 특별한 강사를 초빙한다. 이날 중학교 1∼3학년을 대상으로 '나의 정체성, 니들이 나를 알아?'를 주제로 수업을 진행한 방현희 작가는 청소년들에게도 익숙한 장편소설들을 출간한 작가다. 아이들의 눈높이를 잘 알고 있는 방 작가는 청소년들도 무리 없이 인문학에 다가갈 수 있도록 소설과 영화를 활용했다. 학생들은 이전에 읽어보지 않은 소설이나 오래된 영화에도 마음을 쉽게 열었다. 강좌에 참여한 2학년 정하빈(14)군은 "정체성에 대해 알아가는 수업에서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왔던 '허공 속의 질주'라는 영화를 처음 봤다"며 "옛날 영화나 소설은 잘 보지 않는데 수업을 통해 보니 자연스럽게 흥미가 생겼다"고 했다.


처음에는 '정체성' '실존' 등 어려운 단어의 등장에 어색해하던 학생들은 이내 방 작가가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지자 스스로 답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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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기억이 나기 시작하는 장면이 몇 살부터였지?" "그때 어떤 사건이 있었지?" "그때 옆에는 누가 있었어?" 방 작가는 정체성을 설명할 때 어려운 정의를 드는 대신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직접 고민하고 떠올릴 수 있는 질문들이 나오자 학생들은 '나를 안다는 것'을 멀리서 찾지 않고 자신의 경험들을 꺼냈다. 방 작가는 청소년에게 인문학 강좌를 진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들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어떤 개념이나 주제를 풀어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좌에 참여한 1학년 김도영(13)군은 "요즘 정체성이나 친구 관계에 관심이 많다 보니 커리큘럼을 보고 흥미를 느껴 신청하게 됐다"며 "평소 학교 수업에서는 어려운 개념을 접하거나 재밌을 것 같은 소설에 대해 듣게 돼도 직접 읽거나 보면서 느낄 기회가 없는데 여기서는 다 해볼 수 있으니 새롭다"고 소감을 전했다. 김군은 "정체성·자아 같은 개념들이 어렵고 막연했는데 질문을 통해 답을 던질수록 이게 무엇인지 감이 잡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세곡중학교에서 19일까지 진행되는 강좌를 마지막으로 고인돌 2기가 막을 내린다. 7월부터 진행된 고인돌 2기는 총 31개 강좌 155회의 강의가 서울시교육청 산하 21개 도서관과 평생학습관, 일반 중고교 등에서 이뤄졌다. 1기에 이어 고인돌은 더욱 다양한 주제의 강의를 선보여 시민과 학생들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올해 강의는 문학과 역사·철학 등 인문학의 본령을 넘어 영화·미술·건축·신화·경제사 등으로 외연을 넓히면서 융복합 강좌로 진행됐다. 무엇보다 고인돌 강좌는 현장과 밀접한 소재를 활용해 고급 인문학 강좌의 문턱을 낮추고 열린 대학으로 시민들이 교양에 접하는 기회를 늘렸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인문학적 자극을 준 것도 큰 성과다. 고인돌은 주로 방학을 앞둔 학교에서 정규 수업이 채울 수 없는 부분을 채워주기도 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까지의 한 달 남짓한 기간은 자칫 수업에 집중도가 떨어지지만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시기다. 이때 학생들에게 고전을 통한 사고의 방법 등을 소개해 시험이 끝난 학생들도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관심 분야를 찾을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수능을 마친 고3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최옥정 작가가 진행한 '스무 살에 배우는 어른 되기 걸음마'는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이 강의에서는 예비 스무 살들이 대학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사고하고 관계를 맺고 공부하는 법을 소개했다.

장선화 백상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고인돌은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인문학 강의를 통해 지적인 시야를 넓혀주기 때문에 상당한 호응을 받고 있다"며 "내년 초에 진행되는 고인돌 3기에서는 시민과 청소년들에게 작지만 큰 울림을 전해줄 수 있도록 강의 주제를 더 다양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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