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토요 산책/8월 28일] 말도 안 되는 산행

나이가 많다는 핑계로 최근 몇 년 동안은 다른 식구들 눈치 보지 않고 생일 때가 되면 집을 떠나 1~2주 정도 국내외로 여행을 다녔다. 그런데 올해는 장기간 집을 비울 수 없는 사정이 생겨 가까운 여행지를 고르다보니 춘천고속도로 개통으로 오가기가 훨씬 수월해진 설악산을 택하게 됐다. 설악산을 간다면 등산을 해야 하고 등산이 생일을 기리는 행사가 되자면 대청봉쯤은 올라야 한다.

생각보다 만만찮았던 대청봉


대청봉은 몇 번 올랐지만 집사람하고는 10년 전쯤 오색에서 올라 설악동으로 빠지는 당일 코스를 13시간 걸려 주파한 적이 있다. 이번에도 하루 일정으로 같이 올라야 하니 인터넷을 뒤져 얻은 정보로 한계령 휴게소에서 대청봉에 올라갔다가 오색으로 내려오는 최단 코스를 택하기로 했다. 보통 등산객의 걸음으로 대청봉까지 오르는 데 6시간, 내려오는 데 4시간 총 10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다음날 설악산 쪽은 갠다는 일기예보만 믿고 비가 내리는 일요일 집을 나섰다. 예약한 속초 숙소에 도착하니 비는 여전히 후줄근히 내리고 있었고 밤늦게는 안개까지 끼었다. 자정을 넘기고 오전2시가 지나도록 비가 계속되기에 이번 산행은 포기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5시 반쯤 우연히 눈이 뜨여 환하게 밝은 거실 유리창 밖을 내다보니 뿌옇게 갠 하늘에 대청ㆍ중청의 검은 봉우리가 뚜렷이 보였다. 소청과 귀때기청봉 쪽은 아직 비구름에 가려져 있었지만 갤 기미가 확연했다.

이 나이에 이런 기회는 다시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산행을 감행하기로 했다. 곤히 잠들어 있던 집사람을 깨웠다. 주먹밥 몇 개를 급히 만들어 각각의 배낭에 나눠 넣고 차를 탔다.


8시가 좀 안 돼 한계령휴게소에 닿으니 비는 오지 않고 안개만 자욱했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다른 등산객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30분 동안만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치면 걷기 쉬운 길로 능선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는 정보만 믿고 걷다 보니 길이 뚜렷이 나 있는 그런 만만한 코스가 아니었다. 느닷없이 긴 내리막이 있고 가파른 바위투성이 오르막이 나타나 어디가 길인지 몰라 망설이게 되는 애매한 길목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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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찍 한 팀이 지나갔는지 '산마산악회'라는 종이로 된 표지가 간혹 바위나 나무 등걸에 젖은 채 붙어 있어 길을 잃지는 않았다는 것을 겨우 짐작할 수 있었다. 앞서 간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4시간 산행을 하고 나니 그때야 파란 하늘이 나오고 길도 또렷해졌다.

중청 휴게소가 나타나자 저절로 환성이 터져나왔다. 그곳에서 물을 보충하고 대청봉에는 예정한대로 6시간 만인 오후2시께 올랐다. 우리는 주먹밥 한 개씩 서둘러 먹고 오색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내리막이라 수월할 줄 알았던 길이 예상과는 달랐다.

새로 정비를 했는지 폭은 넓어졌지만 급경사가 다듬어지지 않은 바위 돌로 메워져 있어 발을 내딛기 몹시 거북했다. 오색에 도착하기까지 4시간 반 동안 설악폭포를 지날 때쯤부터 급격히 체력이 떨어진 집사람 손을 잡고 나는 무리한 산행을 강행한 것을 후회하며 제발 무사히 내려갈 수 있기만을 간절히 기구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나는 집사람에게 무모한 리더에 미련한 동반자, 어쩌면 오늘의 산행이 두 사람이 만나 40여년간 살아온 우리 부부생활을 꼭 닮은 것 같다는 말을 하고 말았다. 그래도 용하게 지금껏 살아왔다는 내 말에 집사람도 공감을 하는지 희미하게 웃었다.

산행처럼 험난한 우리 인생길

지난 6월 말께 2주간 외국에 나가 있던 막내 동생이 인사를 왔다. "이번에는 어디 다녀오셨느냐"고 묻는 아우에게 멀리 가지 않고 설악산 대청봉을 올랐다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젊을 때 산을 많이 탄 아우는 "산악회도 따라가지 않고 70을 전후한 노부부 단 두 분이 그런 날씨에 그 코스를 갔다 왔느냐"며 "그건 말씀하신 대로 무모하다거나 미련하다고 하기보다는 아예 말도 안 되는 산행"이라고 했다. 나이가 많아서 하는 일에는 주변의 평가가 대체로 무척 박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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