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노사상생 해법 찾아라] <중> 또 다른 양극화의 씨앗… 비상걸린 중기

"기계 가열에만 10시간 … 근로시간 줄이라니 문 닫으란 말이냐"

경영현실 외면 … 생산차질·경쟁력 저하 불보듯

납품기일 못 맞춰 수출 발목·거래선 끊길수도

인건비 부담에 동남아 등으로 엑소더스 우려

중소업계는 근로시간 단축이 전격 시행될 경우 생산성 저하, 인건비 부담 등으로 가뜩이나 힘든 경영상황이 더 어려워진다고 우려하고 있다. 한 중소 제조업체의 생산현장.
/사진제공=중소기업중앙회


# 경기도 안산에서 지난 20년간 열처리 업체를 운영해온 A대표는 '근로시간 단축은 회사가 망하는 길'이라고 성토한다. 기계의 열을 끄는 데 6~7시간, 다시 열을 높이는 데 10시간 이상 걸리는 생산과정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유독 근로시간이 길 수밖에 없다.

그는 "주말에도 일하는 직원들을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자식들 키우느라 일을 더하면서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근로시간 단축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구직공고를 내도 한달 내내 전화 한통 오지 않는 뿌리산업에서 잡셰어링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말했다.


# 해외수출 비중이 높은 소재 전문업체를 운영하는 B대표는 근로시간 단축으로 해외 경쟁력이 떨어지지나 않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겨우 손익분기를 맞추는 현상황에서 인건비가 높아지면 해외 경쟁업체에 뒤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해외수출은 납기일 준수가 생명인데 근로시간 단축으로 생산차질이 빚어져 해외 거래선을 잃으면 누가 책임질 거냐"며 답답해했다.

정부가 2012년부터 고용창출을 명분으로 추진해온 근로시간 단축이 중소업계의 인력난을 부채질해 중소기업 경영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일부 업체들은 만성적인 인력난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근로시간 단축이 현실화되면 중소 제조업체 가운데 상당수는 문을 닫아야 한다며 강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가뜩이나 대기업에 비해 어려운 형편에 근로시간 단축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양극화 현상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지적이다.


◇인력난→생산차질→경쟁력 저하 악순환=근로시간 단축은 만성적인 인력난을 부추기고 생산차질로 이어지면서 해당 업체와 산업 전체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을 낳을 수 있다. 서병문 주물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현행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어들면 단순 계산해도 생산성이 25%나 떨어지고 근로자들의 임금도 그만큼 줄어든다"며 "생산차질을 피하려면 현행 주야 2교대를 1일 3교대로 바꿔야 하는데 지금도 사람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중소기업들이 과연 3교대를 충원할 만큼 인력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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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지난해 9월 중소기업중앙회가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는 2,101개 중소기업을 조사한 결과 인력부족률은 9.6%(업체당 평균 2.65명)로 고질적인 인력난을 겪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5인 이하 기업의 인력부족률은 26.2%, 6인 이상 10인 이하 기업의 인력부족률은 20.1%에 달하는 등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인력부족은 더욱 심각했다.

인력난 심화로 납기일을 지키지 못해 거래선을 잃는 최악의 상황도 예견된다. 강동한 단조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단조·용접·주물·금형 등 뿌리산업의 특성상 대기업 납품기일을 맞추는 게 생명인데 근로시간을 확 줄여놓으면 어느 기업이 우리한테 일을 주려고 하겠느냐"며 "자동차나 조선 등 대기업 업종은 경기변동에 따라 근로시간이 탄력적으로 움직여줘야 하는데 근로시간이 단축되면 국내 제조업체 하위 5%는 경쟁력을 잃고 문을 닫아야 할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박순황 금형공업협동조합 이사장도 "우리나라 금형 산업이 지난해 처음으로 독일을 제치고 수출 3위를 차지했는데 이의 비결은 높은 기술력에 더한 정확한 납기"라며 "하지만 근로시간을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확 줄여버리면 해외에 제때 납품하지 못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해외 경쟁사에 일감을 빼앗기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인건비 증가로 한국 엑소더스 우려=대구에서 기계부품 업체를 운영하는 C대표는 "고용률을 높이기 위해 정부가 근로시간 단축을 밀어붙일 경우 결국 인건비만 늘어날 것"이라며 "대기업들이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한 원가부담을 협력업체에 여러 방식으로 떠넘기면서 중소기업들의 부담이 가중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런 이유로 인건비가 싸고 노동시장이 상대적으로 유연한 인도네시아 등으로 생산기지를 옮기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는 업체들도 생겨나고 있다. 의류가공 업체를 운영하는 D대표는 "근로시간 단축이 언제부터 시행될지 모르지만 이대로 추진되면 국내 공장을 동남아시아로 이전하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으며 동종업계의 다른 사업주들도 같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생산시설의 해외이전은 당초 근로시간 단축이 노렸던 고용창출과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중소 제조업체들이 노동시장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해외로 제조시설을 이전할 경우 그나마 유지되던 일자리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백필규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근로시간 단축이 고용창출로 이어지려면 기업들이 해외로 나가지 않아야 하는데 중소기업들이 굳이 이런 상황에서 국내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어진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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