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이 지갑을 열어야 경기가 살아나는가.
최근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부유층이 국내에서 마음껏 소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며 골프장 신규 건설 등을 제안했다. 그러나 지난 8일 이병완 청와대 홍보수석이 “상류층은 내수진작에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며 내수를 위해 중산층이 건전하게 육성돼야 한다”고 주장, 소비 활성화를 위한 주타깃을 놓고 엇갈린 견해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민간 경제 전문가들은 이 부총리의 ‘부유층 살리기’ 쪽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서울여대에서 ‘부자학 개론’을 강의하고 있는 한동철 경영학과 교수는 “국내에서 재산세 납부액 100만원 이상에 현금 금융자산만도 1억원을 넘는 고소득층이 약 5%에 이른다”며 “이 5%가 전체 사유지의 55%, 예금의 50%, 백화점 매출의 50%, 카드 사용의 40%를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이 5%의 경우 가계 재무구조가 탄탄해 실제 소비가 크게 줄지 않았지만 국내에서 소비를 줄이는 대신 해외에서 쓰는 것이 문제”라며 “최근 이들 중 3분의1 가량이 해외로 진출해 중국 상하이, 미국 로스앤젤레스ㆍ호주ㆍ뉴질랜드ㆍ타이 등의 해외 부동산을 취득했고 해외 명품 구입도 크게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고 덧붙였다.
과거 사례를 보면 고소득층이 지갑을 열기 시작하면 경기가 본격적인 상승 국면을 맞는 경우가 많았다. LG경제연구원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고소득층은 경기상승 초기에 가장 먼저 소비를 증가시키고 반대로 경기가 둔화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소비를 줄이는 행태를 보였다.
실제로 이번 소비불황이 시작된 지난 2002년 3ㆍ4분기 저소득층(하위 20%)의 소비는 9.3% 증가한 반면 고소득층(상위 20%)의 소비 증가율은 마이너스 3.0%로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와는 반대로 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한 98년 4ㆍ4분기에 들어서면서 저소득층은 여전히 마이너스 9.8%의 소비 감소세를 보인 반면 고소득층의 소비는 마이너스 0.6%로 소비 감소세가 순식간에 둔화되기 시작했다.
송태정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고소득층의 소비심리가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경기의 터닝 포인트에서 먼저 움직이기 때문”이라며 “소비를 줄이든 늘리든 방향성과 관계없이 고소득층의 소비 패턴이 중산층ㆍ저소득층으로 확산되는 효과가 크다”고 설명했다.
특히 최근 IMF와 카드 사태 등으로 인해 중산층 이하 가계의 재무구조가 급격히 악화해 소비 확대를 위한 고소득층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LG경제연구원은 “현 시점에서 소비를 늘릴 만한 재무구조를 가지고 있는 계층은 고소득층밖에 없다”며 “중간 소득 계층의 흑자율은 10.8%이지만 그동안 악화된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저축을 늘려야 하는 상황이며 저소득층은 6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고소득층의 국내 소비를 자극하기 위해서는 국내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 향상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홍순영 삼성경제연구소 상무는 “골프장뿐 아니라 학교ㆍ의료기관ㆍ엔터테인먼트 시설 등 서비스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소비를 살리는 가장 좋은 해법”이라며 “이를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가 가능한 기업들이 신규 사업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터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재산세 대폭 인상 등 ‘분배우선 정책’에 대한 불안감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윤호 LG경제연구원 원장은 “현재의 경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나는 시장주의자’라고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동철 교수는 “많은 부유층들이 해외로 나가는 중요한 이유가 정부의 ‘분배우선 정책’에 있다”며 “부자들이 국내에서 맘껏 돈 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이 돈의 상당수가 국내로 돌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