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다시 흐르는 청계천

조광권<서울시교통연수원장·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위원>

청계천이 다시 흐른다. 하수로 죽어가던 하천에 맑은 물이 흐르고 붕어ㆍ잉어 등 고기 떼가 노닐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이야깃거리를 간직한 광통교가 복원됐다. 지속되는 정치 분쟁과 경제난에 우울했던 시민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쾌거가 하나 이뤄진 것이다. 모처럼의 즐거움 속에서 우리는 청계천에 얽힌 역사의 비밀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는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되풀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왕조 때 청계천은 도시의 배수를 위해 인공적으로 개척(開拓)한 하천이라는 의미로 개천(開天)이라 불렸다. 동국여지승람은 개천에 대해 ‘백악ㆍ인왕ㆍ목멱의 여러 골짜기 물줄기가 합쳐져 동쪽으로 도성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흘러 3수구(水口)를 빠져나가 중량포로 들어간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처럼 개천은 서울 도성의 내부를 거의 정확히 양분했다. 이 때문에 개천은 조선 왕조가 새로운 수도인 한양의 도시 설계를 하는 데 있어 제약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궁궐, 종묘, 사직, 주요 관청들은 모두 개천 이북에 들어섰고 이남으로는 중ㆍ하층 민가지대가 형성돼 상하공간적인 이원질서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개천의 관리 문제는 때에 따라 정치 현안이 되기도 했다. 정도전ㆍ하륜 등 현실적 경세가들이 지배하던 조선 초기 태종ㆍ세종 시기에는 새로운 왕조의 수도 건설과 치수 등 정권 수성 목적으로 준천사업이 시작됐다. 태종은 개천의 본류를 한달여에 걸쳐 지방의 장정 5만여명을 동원해 일시에 대규모로 개척했고 세종은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그 지천과 세천을 개척했다. 하지만 세종 집권 후반기에 들어 개천은 풍수론자와 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됐다. 개천이 경복궁 안으로 통하는 명당수이기에 국운을 위해서는 그것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풍수론자들과 풍수지리는 미신이며 또한 깨끗이 하려다 보면 천변의 민생 침해 우려가 있다는 유학자들 사이에서 소위 명당수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 논쟁에서 세종은 결국 유학자들의 손을 들어줬고 이후 개천은 약 300여년 동안 그대로 방치됐다. 이후 개천은 실학적 사유가 싹트던 영조대에 이르러 다시 정치 현안으로 부각됐다. 영조는 300여년 동안 방치돼 비가 조금만 와도 홍수 피해를 내는 개천에 대해 8년여 동안 고민했고 결국 준천을 결심했다. 그리고 도시유통경제에 밝은 홍봉한ㆍ홍제희 등 실용파 관료들은 이 일에 앞장섰다. 영조가 고민한 이유는 준천사업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영조는 위민(爲民) 때문에 민(民)을 동원하는 준천사업이 공사 과정에서 자칫 민을 괴롭히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재위 36년 영조는 마침내 한성부민과 고용인력인 고정(雇丁) 20여만명을 동원, 두달여 만에 준천 대역사를 완성했다. 이처럼 청계천을 보면 그 시대가 보인다. 청계천 위를 덮은 복개도로와 콘크리트 고가도로를 보면 경제성장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개발시대의 가치관이 보인다. 거액의 공사비를 투입해 고가를 헐어내고 청계천 복원사업을 하는 데에는 생태환경을 존중하는 이 시대의 가치관이 스며 있다. 먼 훗날 지금의 청계천사업이 어떻게 평가받을지는 아직 섣불리 판단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시대를 이끌어간 사람들, 살아간 사람들의 가치관을 적나라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한가지 염두에 둬야 할 것이 있다. 오는 10월 1일의 청계천 완공은 완전한 복원이 아니라 복원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아직도 청계천의 양안도로와 건물 아래에는 옛 청계천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차후 서울 도심부 재개발이 이뤄진 뒤 도로와 건물 밑의 청계천까지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진정한 자연 하천의 복원과 역사 복원에 대해서도 또 다른 논의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서울 르네상스의 진정한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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