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이 적자로 전환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부회계 대차대조표상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의 경기조절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우리 경제의 성장동력에 결정적인 타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금 균형재정 고수와 재정적자 감수라는 두가지 갈림길에 서 있다. 문제는 어떤 방법을 택해도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점이다.
◇매우 힘들어진 나라살림=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은 `예산당국자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라며 곤혹스러운 입장을 숨기지 않았다. 경기부진으로 세금수입이 줄고 공기업 매각 같은 세외수입도 없어지는 반면 국방비와 복지 등 지출수요는 많아지는 어려움 속에서 균형재정기조를 유지한다는 숙제가 한꺼번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게 2~3개월 전의 얘기다. 태풍이 오기 전부터 `최악`이었던 재정 여건은 `매미`로 인해 외길에 몰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다. 이라크 파병이 연내에 이뤄지면 생각하지 않았던 돈이 또 들어간다. 그렇다고 나올 곳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얼마나 부족한가=일단 태풍 피해부터 살펴보자. 17일 새벽까지 잠정집계된 피해규모만 3조4,601억원이다. 재해대책특별법에 의한 집계시한인 이번 주말까지는 피해 총규모가 4조~5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투입할 수 있는 재원은 2조원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다. 올해 책정된 예비비 1조4,000억원 가운데서 아직 집행하지 않은 1조1,800억원중 1,000억원은 이미 긴급비용으로 16일 나갔다. 이제 남은 돈은 1조800억원 밖에 없다. 여기에 국가채무부담행위 한도 1조원이 가용재원의 전부다. 국가채무부담행위란 정부가 발주하는 공사를 민간자본으로 진행하고 대금은 다음 연도의 예산에서 내주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외상공사다.
태풍 피해복구에만 2조원 정도가 부족하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집계하는 피해에는 과장이 있거나 복구지원대상이 아닌 것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렇다. 예산처는 정부 각 부처에서 올해 사업비로 쓰고 있는 예산의 일부를 전용해 복구재원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강구중이다. 무리해서라도 균형을 맞추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라크파병`이라는 변수가 생겼다. 전투병력 3,000명이 간다고 할 때 연간 예산은 약 5,000억~1조원 수준. 올해 안에 전부 들어가지 않고 일부만 집행돼도 큰 부담이다.
◇재정적자 악순환 우려=정부의 의지대로 균형재정을 고수할 수 있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무엇보다 외상으로 수해복구공사를 진행한 국가채무부담행위의 대가를 내년 예산에서 내줘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사실상의 긴축재정으로 실제 순증액이 약 1조원에 불과해 국방비와 공무원급여 인상을 제외한 나머지 항목이 동결 내지 삭감된 마당에 추가로 1조원을 줄여야 할 판이다. 사실상의 마이너스 예산으로 볼 수도 있다. 내년 이후 경기가 크게 좋아지지 않는 한 빠듯한 살림살이가 반복돼 필요한 국가사업을 펼치지 못하는 초긴축이 몇 년간 지속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주한미군기지의 이전비용도 대야 한다.
균형재정을 포기하고 국채를 발행해 적자재정으로 들어가도 마찬가지다. `한번 적자를 내면 헤어나기 어렵다`는 재정의 습성 때문이다. 적자재정국가는 국가신인도 하락, 조달금리 상승을 감수하고 불이익을 받는다. 재정의 기능인 경기조절능력 상실도 우려된다. 통화정책의 효용성이 갈수록 떨어지는 상태에서 적자재정으로 전락하면 정부는 양대 거시경제정책 수단을 잃게 되는 늪에 빠질 수 있다.
◇중기 재정균형으로 선회할 듯=그렇다고 우리의 재정상태가 매우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재정건전성이 높아 적자재정을 해도 다소 여유가 있고 국제경제가 미미하나마 회복기미를 보이고 있는 점은 다행이다. 그러나 국제경제의 불확실성도 여전하고 `상대적인 재정건전성`에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성장률 둔화 등 국내경제여건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는 일단 균형재정에 무게를 두되 차츰 재정적자로 선회하는 방향을 택할 것으로 보인다. 재정운영의 원칙이 `당해 연도의 재정균형에 일희일비할 게 아니라 3~5년단위의 중기 균형재정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 것도 정부의 적자국채발행 선택을 보다 쉽게 만들 것으로 예상된다.
<권홍우기자 hongw@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