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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옥천 28㎞ 마의 구간 불안정한 지반에 잇단 사고
루머 떠돌아 인부 줄행랑도
아산이 직접 곡괭이 들고 독려착공 290일만에 난구간 정복
'도로 건설은 조사와 설계·착공 순인데 한국에서는 역순(逆順)이다. 일단 삽부터 들고 조사, 설계를 하니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을 둘러본 미국 기술진의 평가다. 말로는 신기하다고 했지만 제대로 건설되기 어렵다는 비아냥도 없지 않았다. 그야말로 초고속으로 진행된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최대 난구간은 대전~옥천 구간. 옥천군과 영동군 사이에 소백산맥 줄기를 파고 들어가는 당재터널 공사를 누구도 맡지 않겠다고 버틸 때 아산이 나섰다. 돈벌이보다 명예가 중요할 때도 있다는 판단에서 공사를 시작한 당재터널은 새로운 옥천터널이 개통되며 거대한 김치냉장고로 변신했으나 인간의 정신력으로 난관을 극복했던 시대의 상징물로 남아 있다.
아산 정주영의 현대건설이 맡은 경부고속도로 구간은 128㎞. 전체 구간 428㎞ 가운데 10분의3에 이르는 공사구간에는 억지로 떠맡은 곳이 있다. 충남 옥천과 대전을 잇는 28㎞ 구간. 일단 삽부터 뜨고 보는 분위기였지만 어떤 회사도 나서지 않았다. 그만큼 난공사 구간이었다. 결코 길지 않은 구간 안에 난공사가 6개나 끼여 있었다. 당재터널 상하행선 공사와 금강 2·3·4호 교량 공사, 대전 아치교 공사가 포함돼 있어 응찰하는 회사가 한 군데도 없자 아산은 단안을 내렸다. '현대가 한다. 덩치가 커진 만큼 명예로 사업할 때도 있다.'
호기롭게 시작한 사업은 처음부터 난관에 맞닥뜨렸다. 거대한 돌과 흙이 섞여 지반이 극히 불안정했다. 당재 계곡에서 20m쯤 굴을 파 들어갔을 때 지반이 무너졌다. 사망자가 네 명이나 발생하자 인부들은 작업을 꺼렸다. 공사 진도는 많이 파야 하루에 2m가 고작. 30㎝에 그친 날도 있었다. 더욱 어려웠던 것은 루머와 사기저하였다. 터널 입구의 거대한 느티나무에 있는 산신령이 노했다는 루머 때문에 인부들이 떠나갔다. 육군 공병대가 나서 문제의 느티나무를 뽑아냈으나 작업을 지휘한 군 장교가 교통사고로 입원하는 통에 루머는 점점 커지고 인부들은 야간 줄행랑을 쳤다.
임금을 두 배로 올려 인부들을 붙잡았으나 사고는 끊임없이 터졌다. 공사장 천장을 받쳤던 철 구조물이 엿가락처럼 휘고 갱목이 부러지며 바위가 내려앉았다. 낙반 사고만도 13차례나 발생했다. 200m 구간에서는 다시 30톤짜리 대형 사고로 사망자가 나왔다. 터널 공사 중앙구간에서는 좀처럼 낙반사고가 생기지 않는 통례와 달리 한가운데 250m 구간에서 300톤이나 되는 낙반이 쏟아져 내렸다. 다시 1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요즘 공법처럼 덕트나 통풍구도 없던 시절이라 수직갱을 만들어 파 내려가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으나 시간도, 돈도 없었다.
비만 오면 공사장 근접이 어려웠다. 협곡에 자재를 대기 위해 금강 위에 임시로 가교를 설치하면 비가 쏟아져 떠내려갔다. 공사기간 현대건설이 금강에 설치한 가교가 유실된 것이 무려 11차례. 경부고속도로의 완전 개통 여부가 당재터널에 달렸으나 공기에 맞춰 준공할 수 없다는 패배감이 현장을 지배할 무렵 두 사람이 나섰다. 이한림 건설부 장관과 아산 정주영은 쉴 새 없이 공사를 독려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만주 군관학교, 일본 육사 동기생이면서도 5·16쿠데타 당시 제1군 사령관으로 진압에 나서려다 체포됐을 만큼 원칙주의자인 이 장관은 공기연장 건의를 일축한 채 현장에 일주일에 한두 번씩 들렀다. 정주영은 아예 공사장에서 살았다. 잠이 부족하면 현장을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지프 안에서 새우잠을 잤다. 직원과 인부들이 지프를 보고 더 열심히 일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래도 산은 인간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건설부 장관과 정주영이 공사를 독려해도 1970년 4월까지 공정률은 40% 남짓. 온갖 힘을 짜내 5월을 맞았지만 공기가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상행선 530m 공구 가운데 180m가 여전히 뚫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평균 작업속도라면 4개월 가까운 시일이 소요될 마당이었다. 정주영이 몸으로 나섰다. '곡괭이 이리 내!' 직접 곡괭이를 들고 암반을 쳐내리는 정주영을 보고 매제인 김영주 부사장을 비롯한 임직원들도 공구를 들고 바위에 달라붙었다. 이미 흑자공사는 포기한 지 오래. 정주영은 '국내 건설사 1위 현대'의 자존심과 명예를 지키는 데 승부를 걸었다. 투입인력을 2개조에서 6개조로 늘리고 단양시멘트에는 보통 시멘트보다 20배 빨리 굳는 조강(早强) 시멘트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현대건설 임직원과 인부 500여명이 개미처럼 달라붙어 굴을 파 들어가던 1970년 6월27일 밤11시께, 당재터널 남쪽에서 '만세' 소리가 터졌다. 마침내 경부고속도로의 마지막 공사구간이며 가장 난공사 공구인 당재터널 상행선이 개통된 것이다. 하행선은 이미 한 달 전에 완공된 터였다. 착공 290일 만에 최후의 난구간을 정복한 현대 임직원들과 인부들은 막걸리를 들며 만세를 연달아 불렀다.
당재터널은 2002년 도로선형 개선 공사로 옥천 1·2·3·4터널이 들어선 이래 국도로 바뀌었다. 무수한 사고를 냈던 상행선 구간은 2004년부터 거대한 김치숙성고로 변모했다. 터널 출입구를 막아 섭씨 0~4도의 적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길이 100m, 폭 7m짜리 김치숙성고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자연 김치냉장고로 질 좋은 '묵은지'를 생산해내고 있다. 옛 당재터널 김치숙성고에서 생산되는 묵은지는 고부가가치 김치로 알려져 있다.
경부고속도로는 잇따른 도로 선형개선 공사로 처음의 모습이 많이 바뀌고 당재터널처럼 기능 자체가 변한 곳도 적지 않지만 의의는 추풍령휴게소의 고속도로 기념비에 새겨져 내려온다. '우리나라 재원과 우리나라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 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길'. 당재터널 구간뿐 아니라 전 구간에 속도전이 불면서 모두 77명이 희생된 경부고속도로는 한국 경제의 도약을 이끌었다. 아산 정주영도 고속도로 건설로 더욱 자신감을 얻었다. 건설기술 획득과 장비 현대화를 이룬 아산은 고속도로를 만드는 기술력으로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돈보다 명예를 위해 시작한 당재터널 공사의 시련이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 1위를 달리는 한국 조선산업의 도약도 더 늦어졌을지 모른다. /권홍우 선임기자 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