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십자각] 염치 없는 사회
정문재 국제부 차장 timothy@sed.co.kr
정문재
춘추전국시대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가 지배했던 때다. 먹지 않으면 먹히기 때문에 온갖 전략과 술수가 난무했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에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는 차릴 줄 알았다.
대표적인 예가 패전국 군신(君臣)에 대한 처리방법이다. 다른 나라에 쳐들어가 모든 지역을 차지할 힘이 있더라도 성(城) 한 개 정도는 남겨두는 게 관례였다. 패전국의 왕과 신하가 그 성에 들어가 여생을 마칠 수 있도록 하는 배려였다. 철천지원수라도 이런 관례는 대부분 지켜졌다.
연나라 소왕은 제나라의 침공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절치부심 끝에 국력을 키워가며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명장 악의로 하여금 제나라를 토벌해 수도 임치까지 함락시켰다. 하지만 악의에게 성 1개는 남겨둬 제나라 민왕이 들어가 살 수 있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런 예의를 차린 것은 민심을 두려워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패전국 군신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경우 그저 땅덩어리만 탐하는 ‘폭군’이라는 딱지를 뗄 길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민심은 떠나가고 모든 나라로부터 왕따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어느 때부터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자기 편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예찬 일변도인 반면 자신과 다른 입장을 표시하는 사람이나 조직에 대해서는 살기(殺氣)와 증오만이 불을 뿜는다.
극단적인 이분법논리가 판을 치면서 법치주의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헌법재판소마저 이런 살기와 증오의 십자포화에 시달리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 해석에 대한 최고의 권한을 갖고 있는 국가기관이다. 따라서 특정 정파나 당파를 공격할 때나 사용할 법한 거친 언어와 논리를 들이댈 대상이 아니다.
헌법재판소 같은 국가기관이 당파적 공격대상으로 전락하면 나라 전체가 아노미(anomie)에 빠지고 만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며 독배를 마신 것도 이런 아노미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수오지심(羞惡之心)이다. 수오지심은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쉬운 말로 풀이하면 바로 ‘염치’다.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증오를 퍼붓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염치없는 사회는 서로에 대한 끝없는 증오를 불태우며 공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입력시간 : 2004-10-26 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