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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비밀의 두 단어가 있는데 바로 '환대'와 '공간'이에요. 실제 청핀은 도서사업을 시작한 이래 단 한번도 서점만 운영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화랑·극장 같은 복합문화공간과 함께 했죠. 즉 우리가 제공하는 것은 책이라기보다 바로 사람이 부딪치는 공간, 사람이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입니다."
대만 최대의 서점 체인 청핀서점 홍보담당자 수징팅씨의 말이다. 그는 이어 말했다. "본점이 24시간 운영원칙을 지키는 것도 그런 맥락이에요. 실제 많은 여행객이 새벽 비행기를 기다리기 위해 서점에 들어와 쉬곤 하는데 만약 책을 팔겠다는 생각뿐이었다면 이 사람들에게 공간을 줄 이유가 없겠죠. 이곳에는 약 35만종의 책이 있는데 그건 35만 저자들의 정신이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서점을 방문하는 사람들과 서가에 꽂힌 책 저자들의 생각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서점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다르다 보니 책 구색 맞추기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책 수요가 많은 대학가 같은 곳이야 책 비중을 최고 90%까지 올리지만 이 신이점이 위치한 곳은 대만 최대의 쇼핑지역 중 하나다"라며 "더 많은 방문객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잡화 비중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책 대신 잡화로만 수익을 충당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책의 마진이 높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책을 통한 수익이 훨씬 크다"는 게 그의 말이다. 국내 교보문고 광화문점 등이 책과 잡화·문구 비율을 9대1로 맞추고 있음에도 잡화의 수익이 더 높은 것과는 천양지차다. 그는 "책을 보고 싶은 사람도, 다른 물건을 살 사람도 모두 다 이곳에 와서 한꺼번에 사 간다고 보면 될 것 같다"며 "다양한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매출규모를 늘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만 청핀서점과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잡화형 서점' 또는 '라이프스타일 스토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일본 '빌리지뱅가드'도 눈여겨볼 만하다.
빌리지뱅가드는 외관만 봐서는 아무도 서점이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컵 등 생활잡화를 비롯해 음반·악기도 팔고 정체불명의 인형이나 19금 소품까지 판매한다. 오히려 '만물상'이라는 이름이 훨씬 잘 어울리며 실제로 그냥 '잡화점'이나 '생활용품점'이라고 일컫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주요 상품은 누가 뭐라 해도 서적. 온갖 종류의 책들이 가방과 화장품·식료품 근처에서 팔리고 때로는 귀엽기 짝이 없는 캐릭터들 사이에 오롯이 자리하기도 한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연구원은 "책은 팔리지 않고 잡화만 팔릴 듯하지만 몇 군데 매장을 방문한 결과 매출의 40%를 서적이 차지하는 것으로 확인했다"며 "젊은이들이 부담 없이 쓱 들어가 구경하다가 책을 보게 되는 구조이며 독특한 콘셉트가 제대로 통해 이미 일본 전역에서 수백 곳이 성업 중"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이 서점은 일본 특유의 정서가 담뿍 담겨 있기도 해 외국인들의 관광명소로 꼽히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몇해 전부터 작은 서점을 중심으로 기존의 서점 구조를 탈피하려는 시도들이 엿보인다. 특히 우리의 경우 20~30대 젊은 층이 주축이 돼 불러온 변화라는 점에서 사뭇 고무적이다.
지난 2000년대 초 문을 연 헌책방 가가린은 이미 경복궁 서쪽을 뜻하는 서촌의 명소가 됐다. 미술사를 전공한 두 친구가 의기투합해 연 가가린은 헌책방이라는 본업에 충실하며 중고책을 위탁판매하는 동시에 소규모 출판업을 병행해 '독립출판 서점' 1세대로 꼽힌다. 인디영화·인디음반 등에서 사용되는 '인디', 즉 상업성에 흔들리지 않는 독립적(independent) 성격을 고집하는 독립출판업을 겸하는 서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일반서점에서 쉽게 찾아낼 수 없는 소수 마니아층을 겨냥한 독립출판물들이 많다. 게다가 가가린에서는 미술과 미술사, 디자인 관련 서적도 아마존 '직구'를 통하지 않고 구할 수 있다. 책 외에 아기자기한 디자인 제품, 구할 수 없는 LP판 등도 볼 수 있으며 서점 안쪽에는 작은 갤러리도 있어 볼거리가 넘친다.
서울 은평구에 자리 잡은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나 상암동의 '북바이북' 역시 비슷한 맥락의 공간이다. 강연도 하고 공연도 하는 이 공간은 책방이라기보다 책 마니아 또는 문화계 인사들의 작은 사랑방으로 통한다. 작은 서점을 자주 찾는 한 평론가는 "개인의 취향과 맞는 동조자를 만남으로써 작지만 충성도 높은 하나의 트렌드, 이를테면 '마이크로 트렌드'를 형성하는 현상 중 하나로 볼 수 있다"며 "대량소비로 취향이 함몰될 위기에 처한 문화계에서 자신의 독자적 정체성을 찾으려는 의지가 당분간 이 같은 흐름을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작은 서점들이 만드는 '지역 사랑방'만으로는 독자들의 책 소비를 늘리기에 다소 역부족이라는 의견도 있다. 원래 책과 문화를 사랑하는 이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평소 책과 가깝지 않은 사람들까지 끌어모으기 위해서는 좀 더 문턱을 낮출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백 연구원은 좀 더 본말이 전도돼도 좋을 것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대만의 청핀서점이나 일본의 빌리지뱅가드가 보여줬듯이 꼭 책이 중심이 되지 않아도 좋다는 의미다.
백 연구원은 "책과 사이가 많이 벌어진 시대에 살고 있는 독자들이 일부러 서점까지 찾아가지 않더라도 생활 곳곳에서 책을 만날 수 있는 접점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를테면 극장에 즐겨 가는 영화팬들을 위해 극장에서 영화 관련 서적을 팔고 옷가게에 패션 관련 서적을 진열해두고 자전거 가게에서 자전거 여행책이나 자전거 선수 자서전을 판매하는 식의 전략은 독자나 판매자 모두에게 효율적인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타이베이=이재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