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2월7일] 토머스 모어

1478년 2월7일, 성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대심원장을 지낸 법률가이자 정치가, 경건한 가톨릭 신도로 일생을 보낸 그는 인문학과 경제학의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소설 ‘유토피아’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 Ou(not)와 topos(place)의 합성어. ‘어디에도 없는 땅’이란 뜻이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사회상을 신랄하게 비꼬았다. 당시 영국의 상황은 엔클로저(Enclosure)운동의 극성기. 급증하는 모직물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농장에 울타리를 치고 양을 키우는 바람에 농민은 일터에서 쫓겨났다. 모어는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며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해야 인간의 평등과 복지를 이룰 수 있다’는 ‘과격한 견해’를 내놓았다. ‘공상적 사회주의자’ ‘원조 공산주의자’로 불리는 이유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베이컨의 ‘뉴 애틀랜터스’를 거쳐 로버트 오웬과 생 시몽, 샤를 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오웬의 ‘대국민통합노동조합’과 푸리에의 ‘공산촌’에서 영국의 산업노조와 소호즈ㆍ키부츠 같은 집단촌이 나왔다.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토피아를 ‘현실적 기반을 갖지 못한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사회주의 역시 유토피아의 또 다른 형태였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서 시작된 이상향(理想鄕)을 향한 꿈이 중세 잠복기를 거쳐 모어를 분기점으로 확산된 셈이다. 헨리 8세의 이혼과 영국국교 창립을 반대해 1534년 처형되면서 “내 목을 치더라도 수염은 건드리지 말게. 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네”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가톨릭 교회는 순교 400주년인 1934년 모어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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