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2월2일] 페라리


고차원 방정식이 골치 아프다면 이 사람을 탓하시라. 로도비코 페라리(Lodovico Ferrrari). 3차 방정식을 가다듬고 4차 방정식의 해법을 처음 제시한 사람이니까. 1522년 2월2일 볼로냐에서 태어난 페라리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창 세력이 뻗어나가는 스페인에 맞서려는 교황과 프랑스 연합 간 전쟁의 와중에서 부친을 잃고 삼촌 밑에서 자랐다. 14세 때는 남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갔다. 계약제 하인으로 일하다 도망쳐 나온 사촌형을 대신해 시작한 하인이라는 직업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안겨줬다. 주인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수학자이자 명의로 손꼽히던 의사이며 유명한 도박꾼 카르다노였기 때문이다. 고용한 지 얼마 안 지나 페라리의 재능을 알아차린 카르다노는 그를 양자로 삼아 수학을 가르쳤다. 덕분에 페라리는 18세부터 수학과 기하학 교수로 나설 수 있었다. 근대 수학의 출발점이라는 카르다노의 명저 ‘위대한 술법(Arts magnaㆍ1545년)’이 실은 페라리가 지은 책자라는 평가도 있다. 유명 수학자들과 공개토론을 벌여 승승장구한 그는 볼로냐대학 교수 자리와 추기경 비서, 밀라노 재정담당관을 맡으며 부도 쌓았다. 돈과 명예를 얻었지만 페라리의 말로는 독극물에 의한 사망(1565년)이었다. 범인은 유산을 노린 누이동생이라는 설과 치정관계로 얽힌 제3의 여인이라는 설이 엇갈렸다. 의심을 받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구속되지 않은 누이동생은 페라리 사망 후 보름 만에 결혼했으나 신랑이 전재산을 갖고 도망치는 통에 곤궁하게 살다 죽었다. 근대 수학의 개척자 페라리는 결코 행복한 삶을 영위하지 못했지만 오늘날 아이들보다는 처지가 나은지도 모른다. 수학적 재능 단 한가지만으로 성공한 점이 그렇고 주입식 암기교육의 포로가 아니라는 점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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