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서경 긴급 제언] 금융사고 매뉴얼부터 통째로 다시 만들어라

■ 금융사고 공화국 어떻게 해야 하나

당국·금융회사 손잡고 위기를 기회로 바꿔야


"계속된 금융사고로 금융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기 어려운 수준으로 악화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최대의 위기상황입니다." (3월13일 신제윤 금융위원장)

"금융사고가 연이어 발생해 금융산업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비장한 각오로 사태해결 및 예방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4월14일 최수현 금융감독원장)


위기다. '금융사고 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금융당국 수장들부터 금융사 최고경영자(CEO)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위기의식을 강조한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하다. 다만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면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금융 종사자들은 속된 말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말로만 사고수습을 천명할 뿐 책임을 지고 있는 금융당국과 뼈대(법안)를 만들어야 할 국회, 그리고 일선 CEO들조차 궁극적인 해결방도를 찾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금융당국 수장은 "개인정보 유출, 허위증명서 발급 등 신뢰를 먹고 사는 금융사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믿을 수 없는 사고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지만 지금처럼 위기의식이 '의식' 수준에서 끝나면 더 기묘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금융당국과 일선 금융회사들이 손잡고 금융회사의 금융사고 매뉴얼부터 통째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지난 14일 열린 정무위 법안심사소위는 금융산업 위기에 대한 우리 지도층의 단면을 보여준 상징적 모습이다. 국회에는 개인정보보호법을 비롯해 금융소비자보호법 등 엄중한 상황을 해결할 법안들이 안건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단 한 개의 안건도 처리되지 못했다. 법안소위는 취소됐다. 이유가 가관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5ㆍ18기념곡으로 지정하는 문제가 불거졌다. 법안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엉뚱한 변수가 법안 처리를 막는 코미디가 벌어진 것이다.

15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대회의장에서 최수현 금융감독원장과 10개 시중은행ㆍ국책은행장들이 모여 현재의 위기를 돌파할 방안에 대해 머리를 맞댔지만 뚜렷한 묘안은 도출되지 못했다. "결론은 (금융사들이) 책임을 통감한다(한 시중은행장)"는 지극히 사변적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금융 원로들은 이렇게 추상적인 논점에서 머물 정도로 우리 금융산업이 한가롭지 못하다고 안타까워한다. 금융산업 전반에 켜켜이 쌓인 구조적 모순에 메스를 들이대야 한다는 것이다.

구조적 모순은 이미 드러날 대로 드러났다.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지만 정하면 된다.

큰 틀에서 보면 정치금융의 폐단이 가장 도드라진다. 정치금융은 전문성 없는 인사정책으로 이어져 금융사고의 '확실한' 토대가 된다. 금융권 경험이 일천한 정치권 출신 인사가 대형 금융지주사 고위임원으로 버젓이 명함을 내미는 것은 한편의 블랙코미디다. 정치금융은 또 조직원 간 화학적 결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우리나라 금융산업은 인수합병(M&A)의 역사로 점철됐다.

그러나 물리적 통합만 이뤘을 뿐 화학적 결합은 사라졌다. 내부통제에 심각한 허점이 발생했다. 국민은행에는 노동조합만 3개가 있고 우리은행에서는 상업은행과 한일은행 출신인사 간 자리 돌려먹기가 관습처럼 이뤄진다.

이건호 국민은행장은 이날 회동에서 "실적만이 최고가 아니라 내부관리 노력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며 "내부통제를 위해서 영업점장 등 관리자급의 노력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것"이라고 말했다. 지켜볼 일이다. 전직 시중은행 임원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인사는 최근 전화를 걸어와 "생전 모르는 사람이 상사로 내려오는데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생길 리가 없다"며 "내부통제가 안 되니 금융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금융의 정도가 심한 국민은행, 우리은행 등에서 잇따라 금융사고가 발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금융시장 계층 사다리의 맨 꼭대기에 자리한 금융당국은 정치금융의 수원지다. 금융정책에서부터 금융사고 대처방안까지, 포퓰리즘의 그림자가 너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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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금융당국은 이장호 BS금융지주 회장을 내쫓았다. 순수한 민간기업 인사에 개입했다.

또 규제란 규제는 모조리 풀어주며 카드산업의 양적 팽창에 기여했던 금융당국은 금융소비자 주권이 이슈로 떠오르자 입장을 180도 바꿔 규제의 철퇴를 내리기 시작했다.

금융당국의 행보가 포퓰리즘의 입김에 좌우되다 보니 시스템이 설 자리는 사라졌다.

초동대응은 미숙하고 금융사고 처벌에는 원칙이 없다. 지난 2011년 발생한 현대캐피탈 해킹사건이나 연초 불거졌던 개인정보유출 사고는 금융사 신뢰의 기반이 무너졌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지만 처벌수위는 극단을 오갔다. 김종준 하나은행장의 연임을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금융당국은 몇달도 안돼 중징계 가능성을 내비쳤다.

금융사고 처벌이 정황 논리에 따라 이뤄지는 한 금융산업에 만연한 도덕적 해이를 바로잡을 수 없다.

확고부동한 원칙을 세우고 예외 없이 원칙을 적용하면 땅에 떨어진 금융당국의 위신도 복구할 수 있다.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14일 "그릇된 조직문화와 업무방식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하지만 1조원대 사기대출의 배후에 금융감독원 팀장급 간부가 있었다는 사실은 당국에 대한 시장의 불신을 키울대로 키웠다. 금융당국이 마주한 현주소다.

금융사의 왜곡된 지배구조도 바로 잡아야 한다.

대주주의 전횡 가능성을 시스템으로 막지 못한다면 금융시장을 교란하는 행위는 어느 때고 발생할 수 있다. 저축은행사태나 동양·LIG사태는 모두 대주주의 도덕적 해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역으로 말해 대주주 적격성을 진작에 강화해 시장에 시그널을 줬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김동환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주주 적격성 심사제도를 강화하고 금융사가 효과적인 내부통제 시스템을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논공행상에 따라 치밀하게 다뤄져야 하는 인사정책이 시혜·특혜 수단으로 활용되는 한 금융사고는 또 발생할 것이다. 도쿄지점에서 금융사고가 터지자 은행들은 뒤늦게 지점장 전결한도를 축소했다. 본질을 도외시한 채 이뤄지는 단기대책은 미봉책에 머물 수밖에 없다. 금융당국과 서울본점의 감독·감시에서 한발 떨어져 있는 해외지점에 대한 상시모니터링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

금융상품 유통이나 고객모집 등에서 관찰되는 후진적 시장체계도 수술대 위로 올릴 필요가 있다. 연초 개인정보유출 사고가 벌어졌을 때 대출모집인과 가맹점모집인, 밴(VAN·결제대행업체)대리점 등이 정보유출의 구멍이 될 것이란 우려가 나왔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심하게 말하면 앉아서(알면서) 당한 꼴이다. 금융산업의 기본인 상품을 판매하는 데 위험관리나 통제시스템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졌다. 금융당국은 관할 밖이라 항변하고 금융사는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발뺌했다.

개인정보유출사고는 텔레마케팅(TM) 중단으로 이어지면서 판매채널 시장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급격한 변화는 반드시 부작용을 수반하게 돼 있다. 금융사는 비용절감만 외칠 게 아니라 모집인 제도에 내재된 모순을 찾아내 개선해야 한다. 금융당국은 지금이라도 방송통신위원회와 밴대리점 대처방안 논의를 진전시켜야 한다.

소비자보호대책은 시험대다. 금융소비자보호원 설립을 담고 있는 금융소비자보호법은 현재 국회 정무위원회에 상정돼 있다. 금융소비자보호 이슈에는 소비자와 금융사, 금융당국 등 3각 주체가 얽혀 있다. 각론을 얼마나 촘촘하게 다듬느냐에 따라 금융사고 예방의 성패가 좌우된다. 하지만 정무위에 계류돼 있는 금융법안들은 4월 임시국회 문턱을 넘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위기'에 대한 인식과 '말뿐인 대책', 그리고 되풀이 되는 금융 사고…. 이것이 바로 우리 금융산업의 현 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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