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영웅전 제7보급속히 몰락한 하찬석
하찬석의 전성시대는 길지 않았다. 일본에서 돌아온 조훈현이 득세하면서 하찬석은 급속히 몰락했다. 하찬석이 몰락한 후로는 조훈현·서봉수 양웅의 시대가 펼쳐지게 된다.
한때 「왕위」와 「국수」를 독점했던 하찬석은 아직도 8단에 머물고 있다. 9단의 수효가 20명에 이르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볼 때 그의 부진은 너무도 비감해 보인다.
하찬석의 비극은 먼저 그의 출발이 너무 늦었던 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정예 기사들은 전부 입단 연령이 빠르다.
조치훈은 11세, 린하이펑은 12세, 오타케와 다케미야는 13세, 이시다는 14때에 각각 입단하였다. 다소 입단이 늦었던 가토도 17세에 입단했는데 하찬석은 19세에 비로소 입단했던 것이다.
둘째 원인은 표독성의 부족이었다. 서봉수는 타고난 야성과 표독성으로 조훈현을 물고 늘어졌던 데 반하여 하찬석은 너무도 푸석 푸석하게 물러났다.
셋째 원인은 지방거주 기사로서의 불이익이었다. 그는 합천에서 서울을 사흘에 한 차례씩 오고가면서 조훈현과 연속 10번기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일정을 조정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로에 지친 하찬석은 제대로 숭부를 할 수가 없었다.
조훈현 소년은 상변 백대마에 대한 일발필도의 강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흑84가 결정타. 백85의 굴복은 부득이하다. 이 수로 백 「가」로 받으면 흑 「나」로 하나 젖혀놓고 87의 자리에 치중하여 큰 패. 그렇다고 86의 자리에 받으면 89의 자리 치중 한 방으로 백대마 횡사.
백89로 살기는 살았으나 출혈이 너무 커서 대번에 흑승이 확정되었다. 190수 이하 줄임. 흑6집승.
노승일·바둑평론가
입력시간 2000/08/18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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