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수필집 '길을 묻다'에는 아이의 물음에 고심하는 할아버지의 일화가 나온다. 아이는 할아버지의 수염을 바라보다 문득 할아버지가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시는지 내어놓고 주무시는지 궁금해졌다. 할아버지는 선뜻 답하지 못하고 다음날 일러주기로 한 채 그 자리를 모면한다. 그날 밤 수염을 이불에 넣으니 갑갑하고 내어놓으니 허전해 밤새 뒤척이다 날을 지샜다.
추측건대 할아버지는 갑갑함이나 허전함보다 '내 수염이건만 어찌 이리 기억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밤을 하얗게 지새우지 않았을까 싶다. 답해줘야 한다는 책임은 무겁고 스스로 성찰해보지 않은 지난날은 아쉽고 새날이 밝아올 즈음에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후회스러웠으리라.
후회의 밤을 보낸 할아버지에게서 경황없이 미래를 마주한 우리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우리는 유례없는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두 개의 기적을 동시에 이뤄내고 풍요와 자유가 넘치는 현재를 다음 세대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모든 해답을 주지는 못했다. 아프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산업화와 민주화, 성장 우선과 인간중심의 형태적 균형은 만들었지만 사이사이의 간극과 반목을 상식과 합의로 메우며 미래로 나아가는 내용적 조화에는 답해주지 못했다.
초연결 사회 진입을 앞두고 우리는 다시금 같은 질문에 직면했다. 그간 독보적 정보통신기술(ICT) 인프라와 이용률로 ICT 강국이라는 인정을 받았지만 추진체계 복잡성과 이해의 상충, 법 제도 중첩과 미비 등 한계가 나타났다. 인터넷진흥과 정보보호, 기술 발전과 개인의 보호와 같은 중심적 가치가 대립하며 미래사회로 옮기는 발걸음을 붙잡는 상황이다.
인터넷 시대의 우위를 다음 세대에도 지켜나가기를 바란다면 아이에게 답하지 못한 할아버지와 달리 철저한 성찰을 통해 '변화'라는 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 채 새 아침을 맞는다면 다음 세대는 재도약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융합과 연결의 기반 위에 창의와 혁신으로 꽃피우는 미래 먹거리 발굴과 사업화 기회제공을 위해 사물인터넷(IoT) 실증프로젝트와 같은 다양한 프로젝트를 서둘러야 한다. 이를 통해 다음 세대는 무한경쟁의 바다를 질주하는 융합과 협업, 연결의 역량을 키워내야 한다. 변화의 시대에 길 하나 내주기보다 스스로 길을 만드는 자생력을 길러줘야 한다.
미래발전의 핵심가치인 ICT 진흥과 정보보호가 조화를 이루도록 사회적 합의를 찾는 문화도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한쪽의 발전이 다른 쪽의 발목을 잡는 '트레이드오프' 관계로 오인됐다. 풍요롭고 안전한 미래의 인터넷 사회를 향해 두 가치가 공진(共進)하는 지점을 확보해야 한다. 단순한 기술적 융합을 넘어 가치 공유와 확장의 중요성을 체득할 기회가 필요하다.
'책임'으로 번역되는 'responsibility'는 '응답하다'의 response와 '능력'의 ability가 조합된 단어라고 한다. 즉 '응답하는 능력'이 바로 '책임'인 것이다. 책임감 있는 선대가 되려면 후대에게 미래사회의 방향에 대해 응답할 능력이 중요하다. 내일이 밝아오기 전에 긴 불면을 끝내고 다가올 미래의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