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B 원장은 외국 관광객 증가로 병원을 확대할 계획이었다. 시설자금 대출을 위해 시중은행을 방문했다. 창구에서는 엔화대출을 권유했다. 0%대에 가까운 일본 기준금리로 엔화대출 금리가 원화대출 금리보다 낮았기 때문이다. 원·엔 환율도 100엔당 750원대로 안정적이었다. 고민 없이 대출계약서를 썼다.
자금을 저렴하게 빌렸다는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원·엔 환율은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때 100엔당 1,598원까지 치솟았다. 상환 부담이 두 배 이상 된 셈이다. 2009년 말에는 4~5배 늘어난 대출이자로 고통을 겪는 대출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원금상환은커녕 이자 내기도 빠듯했다. 비슷한 시기에 엔화대출을 받은 인근 C병원 D 원장은 파산을 선언했다.
은행을 찾아가 원금상환을 늦춰달라고 하소연한 것도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무려 7년을 버텼다.
다행히 원·엔 환율이 900대로 급락하며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다.
B 원장은 이때다 싶어 엔화대출 원금을 상환하기로 했다. 언제 다시 변수가 발생해 엔화대출이 부담으로 옥죌지 모르기 때문이다.
B 원장 같은 사례를 경험한 고객들이 최근 엔화대출을 대거 갚아나가고 있다.
우리은행은 지난해 1월 말 737억엔이던 엔화대출 잔액이 올 1월 말 502억엔으로 무려 31.88% 감소했다. 하나·국민·외환·신한은행 등도 같은 기간 엔화대출 잔액이 각각 26.13%, 22.54%, 20.09%, 18.49% 감소했다.
엔화대출 잔액 감소의 주된 원인으로는 △국내외 정세에 따른 환리스크 △일본 저금리 매력 저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학습효과 등을 꼽을 수 있다.
국제유가 하락, 우크라이나 사태, 그리스 채무위기 등 국내외 돌발변수가 확대되고 있어 원·엔 환율 변동성 예측이 불가능하다. 국내 기준금리도 2008년 5.25%에서 현재 2%대로 대폭 낮아져 엔화대출의 금리 유인도 적어졌다. 무엇보다 엔화대출로 피해를 봤던 '학습효과'가 신규 엔화대출 취급을 저해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은행의 거주자 외화대출이 전년 말 대비 소폭 늘어나고 달러화 대출은 19억3,000만달러 늘어난 반면 엔화대출만 전년보다 17억9,000만달러 뒷걸음질치며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은행들도 환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엔화대출 상환이나 원화대출로 갈아탈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일부 은행은 대출전결권 완화와 70%에 이르는 환율우대를 내세우며 엔화대출을 원화대출로 갈아타라고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원화대출과 엔화대출의 금리차가 커야 1%포인트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난다. 만기에 환리스크를 떠안을 이유가 없다. 엔화대출의 유인이 없어진 셈"이라면서도 "그럼에도 신규 엔화대출이 일어나지 않는 가장 큰 원인을 꼽으라면 2008년 이후 겪은 엔화대출의 악몽이라는 학습효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