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9월 17일] 황영기 회장 문책 이후

지난해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쓰나미처럼 몰려온 글로벌 금융위기가 다행히 진정국면에 접어든 듯하다. 그런데 국내 금융계는 금융위기 과정에서 발생된 금융투자 손실의 책임공방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이른바 우리은행의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투자손실을 놓고 금융감독 당국이 황영기 전 회장에 대해 직무정지라는 강력한 제재조치를 취한 것이 적절한지가 논란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특정인 책임추궁에만 집중돼 금융당국이 공개한 황 회장의 직무정지 처분 사유에는 각종 위규사항과 경영전략상의 오류 등이 포함돼 있다. 그 주된 내용은 우리은행 감사위원회 등에서 투자위험성에 대한 지적이 있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등의 위규사항을 포함해 본부별 경영목표를 이사회에서 부여한 목표치보다 높게 잡아 무리한 투자를 유발하는 등 이사회의 법적 권한을 넘어서는 독단적인 경영을 했다는 것이다. 한편, 황영기 전 행장은 자신이 부채담보부증권(CDO), 신용파산스와프(CDS)에 투자했을 때는 금융시장이 정상적이었고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자신이 퇴직한 후 시장상황이 나빠졌을 때 적기에 되팔지 못한 데 이번 손실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민의 혈세로 조성된 정부 공적 자금을 지원 받은 금융기관이 이처럼 대형손실을 입은 것에 대해 당연히 경영책임자가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할 뿐 아니라 투자과정에서 위규사항이 있다면 법률적 책임까지 져야 한다는 입장과 자신은 당시 금융시장 상황에 따라 투자를 결정했고 대규모 투자손실은 퇴임 후 발생했으므로 책임지기 억울하다는 양측의 입장이 모두 나름의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방을 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확인하고 고민해야 할 본질적 문제는 흔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국내 금융계는 은행 간 인수합병(M&A)을 통해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대형은행을 육성해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시중은행들 간 자산증대 및 수익률 제고를 위해 무한경쟁을 해왔다. 한편, 금융당국도 규제완화, 투자은행(IB) 육성 등 미국식 금융 시스템 구축과 투자시장 확대를 독려 내지 장려해온 것이 현실이다. 우리은행의 경우 이런 분위기를 타고 공격적 경영을 해왔고 이번에 문제가 된 파생금융상품 CDOㆍCDS 투자손실(1조6천억원)도 그와 같은 금융시장 분위기와 황영기 회장의 공격적 경영전략 실천과정에서 발생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 투자손실은 특정 개인의 책임일 수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측면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금융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돼 발등의 불을 끈 현 시점에 필요한 것은 특정인의 책임추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번 사태의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향후 이런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은행 시스템 개선방안, 그리고 사후적 책임추궁이 아니라 사전 예방적 감독 시스템 구축을 위한 개선과제가 무엇인지를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한다. 또한 앞으로 적극적인 금융투자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는 이번 문책조치의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금융시장에서는 이와 같은 건설적 담론보다는 '황영기 전 회장이 현 정부 실세와 관계가 좋지 않아 보복을 받았다'거나 이번 사태로 '변양호 신드롬'이 다시 번질 것이라는 등의 말만 무성하다. 또한 금융감독 당국도 근본적인 대책강구보다는 몇몇 관련자 징계로 서둘러 사건을 종결하고 여론이 불리해지지 않을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듯하다. 금융권 체질강화 대책 마련을 이래서는 천문학적인 투자손실과 수십명에 이르는 관련자들이 직장을 잃거나 중징계를 받은 뼈아픈 상처를 남긴 이번 사태는 단순히 하나의 해프닝으로 그치게 될 뿐 우리 금융의 균형 있는 성장에 필요한 자양분이 될 여지는 전혀 없다. 금융시장 참여자들은 물론, 감독 당국도 눈앞의 현실만 바라보고 책임회피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보다 대국적인 시각에서 이번 투자손실의 발생원인, 나아가 국제금융 시장 움직임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우리 금융시장의 체질강화 방안을 고민하는 자세로 이번 사건에 접근해보기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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