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리빙 앤 조이] 이념이 무너진 곳에서 꽃피는 다국적 예술

■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 세계 장벽의 어제와 오늘<br>베를린서 예술가 1,000명 도미노쇼 DMZ 일대 세계복합유산 등재 추진





검문소 반대편에서는 사람들이 환호하며 막 도착한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 서로 포옹하고 장벽 앞에서 춤을 추었다. 국경검문소 통로는 그곳을 지나려는 사람들에게 너무 좁았다.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바늘구멍처럼 좁은 동쪽 입구로 밀려들었다. 용감한 사람들이 장벽 위를 넘도록 그들을 도왔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장벽을 넘기 시작했다. 수백 명이 시멘트벽을 기어오르려 애썼다. 위에 먼저 올라간 사람이 서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다른 사람을 끌어올렸다. (중략) "보십시오, 장벽이 오늘 무너졌습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입니다." 리포터가 외쳤다. -소설 '장벽 너머 너에게'(카티야 힐데브란드, 2008) 중 1989년 11월9일 오후 9시 높고 단단했던 냉전의 장벽이 무너졌다. 동독과 서독을 가르던 이념의 장벽, 냉전의 상징이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헝가리, 체코, 폴란드 등 동유럽의 사회주의 정권도 연이어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덧 스무해가 흘렀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소통과 왕래를 가로막았던 장벽이 무너지고 난 이후의 세계는 자연스럽게 변화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게 되고 닫혀있던 창구가 열리면서 소통하고 왕래하게 된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과 달리 아직도 세계에는 소통을 가로막고 민족을 가르는 인위적인 장벽이 남아 있다. 50년 넘게 한반도의 좁은 땅덩어리를 가르고 있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가 그렇고 아직도 건설중인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사이의 분리장벽이 그렇다. 소통과 왕래를 가로막는 세계의 장벽들도 베를린 장벽처럼 언젠가는 무너질까. ◇예술로 승화된 베를린장벽=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것은 1961년. 동독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서독으로 계속 탈출하자 동독 정부가 이들을 막기 위해 서방 3개국이 분할점령중이던 서베를린에 40여㎞에 달하는 콘크리트 담장을 세웠다. 동ㆍ서독을 가르던 콘크리트 담장은 통독 이후 대부분 철거됐고 지금은 브란덴부르크문을 중심으로 일부만 기념물로 남았다. 하나로 합쳐진 독일, 그 중에서도 격동의 시기를 겪었던 베를린 일대는 '예술의 용광로'로 거듭나고 있다. 물론 그 바탕에는 분단과 반목, 통일과 화합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베를린 장벽은 하나의 캔버스이자 예술적 영감을 주는 도구가 되었다. 베를린 장벽 잔존 구간 중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역시 예술 도시 베를린을 상징하는 곳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든 118명의 예술가들이 벽화를 그린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관광명소가 됐다. 예술의 도시로 거듭난 베를린에서는 오는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기념 퍼포먼스 행사가 예정돼 있다. 세계각국의 예술가 1,000명에게 스티로폼 패널을 보내 장벽을 주제로 한 작품을 받아 도미노쇼를 벌이기로 한 것. 여기에 평소 분단과 통일, 한국의 현실에 천착해온 한국 작가 3명도 초청됐다. 화가 서용선은 남북 경비병들이 등을 맞대고 선 작품 '감시의 눈'을, 조각가 안규철은 장벽을 허물고 뛰어넘는 갖가지 방법을 조각으로 담은 '철조망'을, 소설가 황석영은 소설 '오래된 정원'의 대목을 한글과 독일어로 적어 넣은 '오래된 정원'을 각각 전시한다. ◇인종 분리하는 790㎞의 장벽=2002년 6월부터 이스라엘 정부가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가자 지구 서안 지역과 예루살렘 외곽에 세우기 시작한 분리장벽은 8m 높이의 콘크리트벽과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책으로 구성돼 있다. 8~10m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은 인구가 밀집된 도시를 중심으로 건설되고 농촌 등 밀집도가 낮은 지역은 철책이 세워지고 있다. 현재 분리장벽은 60% 가량 완성이 됐으며 최종 완공시 전체 길이는 790㎞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2004년 7월 분리장벽 건설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인권을 침해해 국제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했으나 이스라엘은 ICJ의 판결에 구속력이 없다는 이유로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살폭탄 테러를 방지하고 서안 지역 내 유대인 정착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분리장벽 설치가 불가피하다며 '인종차별 장벽', ' 분리 장벽'이라는 명칭 대신 '안전 울타리', '보안 장벽' 등으로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이스라엘이 향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건국했을 때 국경 확정 협상에서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이 장벽을 설치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장벽이 완성될 경우 팔레스타인은 독립국가가 되더라도 장벽 안에 갇힌 감옥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 또 이스라엘이 건설중인 장벽 노선 중 4분의 3이 서안 지역과의 경계인 그린라인을 침범해 있으며 장벽이 완성되면 서안 지역 중 850㎢의 땅이 이스라엘 쪽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으로서 가장 큰 문제는 장벽이 세워지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생활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상당수 주민들이 장벽 너머에 농지, 일터, 우물, 심지어는 가족까지 두고 있어 삶의 터전과 가족을 빼앗긴 이들이 수두룩하다. 8m나 되는 장벽을 아슬아슬하게 곡예하듯 넘고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책의 구멍을 찾아 목숨을 걸고 돈을 벌러가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일상은 처참하다. 한편 최근 가자ㆍ서안지구에는 평화운동가들이 모여들고 있는데 특히 네덜란드 출신의 젊은 예술가들로 구성된 센드어메시지 재단(www.sendamessage.nl)에서는 30유로를 기부하면 이스라엘 분리장벽에 원하는 메시지를 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덕분에 장벽 곳곳에는 '이 벽은 무너질 것이다' '이 벽은 미국이 지불한 비용으로 지어졌다(paid by USA)' 등 정치적인 메시지부터 '○○ 결혼하다' 등 개인적인 내용까지 다양한 문구가 적혀있다. 재단측은 "낙서로 분리 장벽을 허물어뜨릴 수는 없겠지만 모인 기금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사회ㆍ문화ㆍ교육정책에 활용된다"고 전했다. 올 4월 현재 850여개 항의 메시지와 모금액 2만5,000유로 가량이 모였고 이는 모두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사업에 활용됐다고 재단측은 밝혔다. ◇생태박물관으로 떠오르는 한반도의 DMZ=독일이 통일된 후 한국인들은 비슷한 통일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한반도를 가르는 장벽은 무너지지 않고 있다. 1953년 7월27일 국제연합군, 조선인민군, 중국인민지원군이 휴전에 합의하며 적대적 행위로 인한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 한반도 중앙을 동서로 가로질러 만들어놓은 중립지역인 비무장지대(DMZ). 동서 길이 248㎞에 달하는 이 지역은 민간인과 군인을 막론하고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는 곳으로 남북 분단의 상징이자 비극의 현장으로 버려진 공간이었다. 그러나 영화 '공동경비구역' 등 분단상황을 주제로한 영화ㆍ문학 작품의 대중적 성공,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 남북협력 사업 확대에 따른 긴장 완화 조짐에 힘입어 DMZ 일대 접경지역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1998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500마리를 몰고 군사분계선을 넘은 데 이어 2007년에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 참가하기 위해 대한민국 국가원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군사분계선 앞 30m 지점에서 하차해 북측관할지역으로 걸어들어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DMZ는 최근 남북 접경지역의 생태적 가치가 부각되면서 세계적인 생태관광의 중심지로서 가능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익히 알려져 있듯 DMZ는 천혜의 자연박물관이다. 이달초 환경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철원ㆍ역곡천 유역 등 중부지역 비무장지대에는 구렁이, 묵납자루, 참매, 삵 등 멸종위기 야생동물과 쑥방망이, 용굿나물, 쥐방울덩굴, 흑삼릉 등 희귀식물이 다수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환경부는 생태 조사를 통해 철새 도래지, 대암산 용늪 등 DMZ 일대를 '문화ㆍ생태가 함께하는 세계복합유산'으로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할 예정이다. 지난해부터 DMZ 관광이 본격화되면서 군ㆍ민간 협력도 성공적이어서 강화군의 경우 해병대와 협의회를 통해 민통선 내 관광지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군 초소를 뒤쪽으로 옮기는 등 성공사례를 내놓고 있다. 김호기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50여년간 개발과 출입이 제한되면서 이 일대는 자연스럽게 생태적 복원과정을 거쳐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생태 환경을 보존하고 있다"며 "DMZ 일대를 어떻게 보존하고 개발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에서 나아가 북한과 상호협력 아래 이 지역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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