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11월 3일] <1541> 조지 피바디


하버드와 예일ㆍ밴더빌트. 두 가지 공통점을 가진 미국 대학교들이다. 명문이라는 점은 유명하지만 나머지 하나는 무엇일까. '피바디'다. 단과대학이나 대학원ㆍ박물관에 피바디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미국 최초의 국제금융인이며 대규모 자선사업의 선구인 조지 피바디(George Peabody)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매사추세츠 사우스덴버시에서 1795년 태어난 그는 부친을 일찍 잃고 여섯 동생을 먹여 살리느라 삼촌의 잡화점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직물장사로 성공한 그를 대부호의 반열에 오르게 만든 계기는 42세에 단행한 영국행. 직물중개상으로 시작해 자연스레 금융업에도 손을 댔다. 사업은 늘 위태로웠다. 걸핏하면 채무불이행을 선언하는 미국 주정부들의 신용불량 탓이다. 반복되는 디폴트(부도)에 허덕이던 그는 1848년 유럽을 휩쓴 혁명 분위기를 타고 재산을 불렸다. 영국 자본가들이 불안한 유럽 대신 미국을 투자 대상으로 삼은 덕분이다. 헐값에 떠안았던 미국 채권의 가치가 뛴 덕분에 그는 요즘 가치로 237억달러를 모았다. 미국 최대 부호였으나 독신이었던 그는 피바디은행의 경영을 주니어스 모건에게 맡겼다. 한때 세계최대의 금융자본으로 군림한 JP모건 제국의 신화가 여기에서 나왔다. 말년의 그는 영국 런던 도심지에 빈민을 위한 주택을 짓고 대학에 거액을 기부하며 남북전쟁으로 폐허가 된 미국 남부에 구호의 손길을 보냈다. 요즘 가치로 130억달러의 재산을 헌납한 그는 미국식 기부문화의 효시로 꼽힌다. 악착같이 아끼고 모은 돈을 베푼 그가 1869년 11월4일 런던에서 사망(74세)했을 때 영국은 최신ㆍ최대 전함으로 그의 시신을 미국으로 운구하며 고인을 기렸다. 그의 명성은 피바디시로 이름이 바뀐 고향에도 전해져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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